【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갑질’. 이는 권력의 우위에 있는 사람, 즉 ‘갑’이 상대적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한다. 인터넷 ‘검색어’란에 입력만 하면 숱한 기사가 쏟아져 내리는 ‘갑질’은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 됐고 사람들은 웬만한 ‘갑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8일,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려진 ‘땅콩회항’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갑질의 역사는 다시 쓰였다. 사건은 이러했다. 같은 달 5일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조현아 전 부사장은 마카다미아를 봉지째 준 승무원의 서비스를 문제 삼아 난동을 부리며 이륙을 준비 중이던 항공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강제로 내리게 했다.

땅콩 하나로 비행기를 회항시킨 이 사건은 그동안의 갑질과는 수준이 달랐고, 사건의 주인공인 조 전 부사장은 단숨에 ‘갑질 끝판왕’으로 올라섰다.

대한항공은 즉시 이와 관련한 입장을 표명했지만 일은 더욱 커졌다. 오히려 조 전 부사장의 입장을 두둔하는 내용의 사과문 아닌 사과문이 공분을 산 것. 또한 사건 조사 과정에서 사무장에게 허위 경위서 작성을 지시하는 등 잘못된 방법으로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사실이 알려지며 사건은 더욱 악화됐다.

결국 형식적인 사과로 무마하려던 사건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며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국 조 전 부사장은 법정에 서게 됐다. 법정에 선 조 전 부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고 했으나 이미 여론은 싸늘해진 뒤였다.

일을 크게 만들었던 건 단순히 ‘갑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 전 부사장과 대한항공이 보여준 태도가 더 큰 문제였다.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질 것 다 가진 ‘갑’의 당당한 태도가 ‘을’들의 분노를 키운 것. 이에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작년 12월 12일 “자식교육을 잘못시켰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후 잠시 잠잠하던 이 사건은 얼마 전 조 회장이 조 전 부사장의 복귀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다. 조 회장은 지난달 17일 파리에어쇼가 열린 프랑스 르부르제 공항에서 세 자녀의 경영 및 승계 문제와 관련해 “세 명이 각자 전문성이 있으니 역할과 전문성을 최대한 살리겠다”고 말했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인 탓일까. 조 회장은 지난해 12월 입장 발표 때 대국민 사과를 하며 경영 복귀 가능성에 대해 부인했던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조 회장의 이번 발언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의 기억은 이미 리셋(reset)돼 버린 듯하다. 지난해 국민들이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 진정한 반성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는 모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 이 시점에 딸의 복귀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겠는가.

현재 조 전 부사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상태다. 항공보안법상 항공기항로변경 혐의로 기소된 조 전 부사장은 5월 22일 항소심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143일 만에 풀려났다. 이렇듯 조 회장은 집행유예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조 전 부사장의 복귀 가능성에 대해 입을 뗀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찬밥도 먹어보고 눈물도 흘려보며 고생한 딸”을 위한 아버지의 정말 눈물 나는 부정(父情)이다. 그러나 지나친 사랑은 화를 부르는 법, 자식 사랑에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듯한 그의 태도에 또다시 국민들은 ‘너무 성급하다’며 분노하고 있다.

기자가 어제 갔던 작은 맥주가게 벽면에 붙어있는 글귀 중 이런 말이 있었다. ‘손님이 짜다면 짠 것’. 이 말마따나 국민들이 ‘아직 이르다’고 하면 이른 것이다. 하다못해 동네장사를 하는 작은 맥주집도 자신들의 음식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손님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낮은 자세를 취하는데 이와 비교도 안 될 만큼의 큰 기업에 더 큰 책임감, 더 깊은 소통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소통에 대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해 경영상의 변화로 소통 광장을 만들었다”는 조 회장. 그가 생각하는 소통이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지만, 수박 겉핥기 식의 소통이 아닌 ‘진정한 소통’만이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예방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조 전 부사장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귀’가 아닌 ‘진심 어린 반성’이다. 또다시 공분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비행기 안에서 “내리라”며 당차게 소리치던 그녀가 이후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에 사법적 판단뿐만이 아닌 국민들의 분노가 한몫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의 아버지 조 회장도 이제 그만 눈먼 자식사랑에서 벗어나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난해 논란이 불거지자 “왜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똑바로 얘기하지 않았냐”며 직원들을 호통치고 대국민 사과를 했던 조 회장의 모습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된 쇼가 아니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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