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여성노숙인 자활시설 ‘화엄동산’에 가다

   
▲ 화엄동산 1층 내부 ⓒ투데이신문

화엄동산, 1998년 설립 이후 17년간 ‘여성노숙인’ 자립 힘써
홈리스 여성 15명, 오손도손 정답게 지내
화엄동산 입소 조건 ‘일하고자 하는 의지’
여성이 노숙인되는 경우… ‘가정불화’도 한 원인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대한민국 엄마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빠들은 몰아치는 회사 구조조정에 울었던 IMF 외환위기의 시대, 1998년.

꽁꽁 얼어붙은 경제로 노숙인이 늘어나던 당시 여성을 위한 노숙인시설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단체가 있었다. 바로 불교신자의 모임인 사단법인 <우리는 선우>였다. 이곳 회원들은 뜻을 모아 여성노숙인 자활시설 <화엄동산>을 만들었다. 이름은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서 따왔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지내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화엄동산>은 17년간 한 자리를 지키며 홈리스(homeless‧노숙) 여성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 덕분에 갈 곳 잃은 홈리스 여성들은 이 울타리 안에서 편히 쉬며 직업을 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숙식을 무료로 주고 국가 의료제도와 연계해 건강도 보호해준다. 그 외에도 심리, 취업, 법무 상담도 진행하며 여성들의 홀로서기를 돕는다. 현재 이곳에 사는 홈리스 여성은 15명인데 미혼 여성은 3명이다. 이곳은 가정폭력, 가족불화 등으로 집을 나온 빈곤 여성이 대부분이다. 주로 서울역 다시서기센터나 희망브리지센터와 같은 곳을 통하거나 가정폭력 피해자센터를 경유해 온다. 거처가 없다고 무조건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립 의지가 있으면 <화엄동산>과 같은 자활시설로, 알코올중독이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면 재활시설이나 요양시설로 가야 한다. 이 때문에 <화엄동산>은 입소 전에 면접을 치르기도 한다.

<본지>는 지난 27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자리한 여성노숙인자활시설 <화엄동산>을 찾았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홀로서기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났다.

   
▲ 화엄동산 건물 전경 ⓒ투데이신문

“내 꿈,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홈리스 여성들에게 “언니”로 불리는 <화엄동산> 이혜숙(59)소장은 이곳에 사는 두 여성을 소개해줬다. 두 사람의 사연은 구구절절했고 파란만장했다. 이들은 거듭되는 질문에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서슴없이 이야기했다.

정모(56)씨는 올해 4월, <화엄동산>에 문을 두드렸다. 정씨는 노모와 남동생 이렇게 셋이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10년간 운영하던 제과제빵 도구 판매장을 접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정씨는 남동생의 갑작스러운 폭행으로 집을 나오게 됐다고 했다.

본래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정씨는 1986년,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과 불화를 겪었다. 결국 아이가 6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편지 한 장 남긴 채 막차를 타고 친정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어린 아들은 시어머니에게 맡겼다. 시간이 흐른 뒤 정씨는 아들을 군대 면회소에서 처음 얼굴을 봤다. “멀리서 봐도 내 아들인 게 딱 느껴졌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의 벽은 생각보다 두꺼웠다. 한평생 아들을 그리워하던 늙은 어머니와 달리 아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뭐, 그동안 엄마한테 쌓인 게 있었을 테니까…”.

시종일관 당차게 말하던 야무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빨개진 눈에서 눈물이 가득 찼다. 그녀는 자립하고 난 뒤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이라고 했다. 정씨는 나이 때문에 일자리 잡기가 어렵다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였다.

“나는 강단에 서고 싶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 교수가 되고 싶어요. 나는 이 꿈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거든요”.

그녀는 신학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내 눈물이 거둬지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정씨 옆에 앉은 김모(53)씨의 인생길도 굴곡이 심했다. 김씨는 “7년 동안 찜질방에서 지냈어요”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옆에 있던 정씨가 “어머, 세상에!”하면서 김씨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김씨가 보금자리를 찜질방으로 택해야 했던 이유는 ‘이혼’ 때문이었다. 10년간의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남편은 아이들을 데려갔고 살던 집도 경매에 넘어갔다. 더는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씻을 수 있고 잘 수 있는 찜질방에 들어갔다. 김씨는 공원에서 청소일을 하면서 근근이 버텼는데 한순간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일할 곳이 사라지자 주머니 속 돈도 조금씩 사라져 찜질방에 머무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던 3월, 결국 그녀는 짐을 한 보따리 안고 무작정 찜질방을 나왔다. 어디로 갈지 막막했지만 다행히 경찰의 도움을 받아 <화엄동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한 달 뒤 병원 청소일을 시작했고 현재 자립에 힘쓰고 있다.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4시가 돼서야 끝나지만 일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김씨는 말했다.

   
▲ 화엄동산 2층 침실 ⓒ투데이신문

홈리스 여성, ‘심리치료’가 먼저

노숙인이 되는 과정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보통 남성은 사업실패, 실직 등 재정적 요인이 대부분이다. 반면 여성의 경우 남편과의 갈등, 가정폭력 등 인간관계가 요인이 된다. 이런 홈리스 여성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심리치료다. 하지만 심리치료를 받으려면 구청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곳 여성들은 대부분 일을 하고 있어 퇴근 시간과 프로그램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서 제대로 이용하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이혜숙 소장의 희망사항은 홈리스 여성에 대한 심리적인 지원이 잘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자원봉사자의 손길이나 정부의 지원이다. 이 소장은 상처가 많은 홈리스 여성들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제일 좋은 건 심리 전문가가 시간을 내기 어려운 <화엄동산> 식구를 위해 직접 방문하는 것. 하지만 비용적인 측면에서 걸리는 장애물이 많다.

더욱이 이 소장은 전기세와 같은 부분이 조금 모자랄 때가 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 소장은 “서울시에서 운영비를 90% 정도 지원받고 있는데 나머지 10% 정도는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모인 후원금은 전액 화엄동산 식구들을 위해 사용된다.

화엄동산은 일자리를 연계하고 홈리스 여성들이 돈을 모을 수 있도록 돕는다. 예컨대 매월 간담회를 열어 건의사항을 듣고 통장 사본 등을 내도록 한다. 또 실직한 여성 노숙인에게는 일자리를 연결하고 자격증 취득을 돕는다. 한편, 홈리스 여성들은 6개월마다 연장 심사를 받는데 이를 통과하면 계속 있을 수 있지만 이마저도 최대 2년이다. 물론 다른 시설로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

2013년 12월 말, 서울시는 LH공사에서 미분양된 주택을 싼값에 매입했다. 이에 <화엄동산>은 서울시가 제공하는 매입임대주택 1호를 임대받았고 홈리스 여성 3명이 입주했다. 이 소장은 홈리스 여성들이 자립하거나 가족 품으로 잘 돌아갈 때 뿌듯하다며 웃었다. 

   
▲ 화엄동산 2층 내부 모습 ⓒ투데이신문

2층 그녀들의 수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요”

사무실이 있는 1층에서 이야기를 마친 뒤 기자는 정씨, 김씨와 함께 2층으로 향했다. 그들의 보금자리가 궁금해서였다. 2층에 오르자 여성이 사는 곳임을 보여주는 신발이 가득했다. 고맙게도 정씨는 방으로 뛰어가 취재에 응해달라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한 사람이 “오늘 들어온 신입”이라며 이모(38)씨를 소개했다. 이씨는 수줍은 듯 갖고 있던 노트북에 얼굴을 묻었다. 바로 옆자리에 있던 권모(54)씨가 이날 들어온 이씨에게 조언을 했다.

“처음에 대화를 안 하고 친해지는 분위기를 안 만들면 (사이가) 좀 힘들어지더라고. 처음에 말을 잘 안 했던 사람은 온종일 있어도 별로 말을 안 하게 되더라. 그러니까 어색해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

시원하고 호탕한 성격을 지닌 경상도 출신의 권씨가 이씨에게 상냥한 웃음을 띠며 말을 건넸다. 이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권씨는 월급을 받는데 이 중 80% 이상을 저축하고 있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단하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여기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니까 돈이 안 들어가요. 아프다고 하면 병원비도 대주니까요. 쓰는 거라고는 교통비 정도죠. 이곳에서 해주는 만큼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건 저축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한테도 뚜렷한 목표가 있어요”.

권씨는 자신이 살아가는 힘은 “자식”으로부터 나온다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 딸 때문에 이 세상 살아가요. 우리 딸들이 없으면 나는 무너질 것 같아요. 딸이 응원해주니까 그 힘으로 살지… 정말 아이들이 나한테는 희망이에요. 진짜로!”.

그녀의 두 딸은 엄마의 희망답게 잘 자라, 대학에 들어갔고 최근 좋은 직장도 얻었다. 권씨는 자신의 딸을 스스로 잘 커준 고마운 자식이라며 대견해 했다. “우리 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 화엄동산 2층 침실 ⓒ투데이신문

이날 처음 들어온 이씨도 낯선 표정을 거두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씨는 3년 전부터 계속 취업 문을 두드렸다. 발바닥에서 진물이 나고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사회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발이 팅팅 부어 있었다. 이씨는 그런 발을 붙들고 다시 일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과거 건설회사에서 사무직 일을 했던 이씨는 요즘은 일자리 구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3년간 취업 준비를 하면서 투자한 돈만 모았어도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저 그 정도로 많이 노력했어요”라고 고백했다. 아울러 지원자의 능력보다 나이와 외모를 따지는 행태에도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도 겉모습만 보고 사진 않잖아요. 만져보기도 하고 성능이 어떤지 따져보고 사지 않나요. 사람도 못생기거나 뚱뚱하다고 해서 일을 못하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씨의 말을 들은 <화엄동산> 식구들은 그녀를 격려하며 응원했다. 이내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취재 후(後)… “삶은 고구마 4개”

기자는 취재를 마치고 사진을 찍으려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권씨가 “누가 고구마를 갖다 놨네”라고 소리쳤다. 권씨는 작은 고구마 두 개를 손에 쥔 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우리는 네 개로 나뉜 고구마를 먹으며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작은 고구마를 보며 생각한다. 내가 가진 고구마를 어려운 이를 위해 조금 떼어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고구마를 쪼갤 때 우리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어 아까울 테다. 아마 배도 조금 덜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쪼개진 고구마를 먹으며 따뜻함에 미소 지을 것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