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요새 독자들 사이에서 일본의 지식인 사이토 다카시의 책이 널리 읽히고 있다. 그 소비의 맥락은 인문교양적이라기보다는 자기계발적인 것이다. 원래 일본 특유의 실용주의적 자기계발서들이 널리 소비되는 편이기는 하다. 쉽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카시의 경우는 원래 자기계발 전문가라기보다 교육심리학자로 잘 알려진 현직 교수(메이지 대학)이다. 그는 교육학 연구자와 자기계발 강사의 사이에 서 있다.

교육심리 학자와 자기계발 강사

<삼색볼펜 초학습법>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지만,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으로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물론 <온톨로지 알고리즘>과 같이 조금 전문적으로 보이는 책은 바로 외면당했지만, 이에 곧 이어서 출간된 <말하고 듣기의 달인>이나 <읽고 쓰는 힘>은 제법 주목을 받았다. <독서력>이나 <공부의 힘>도 마찬가지다. 상황은 간단하게 정리된다. 실용적인 책들은 팔리고, 이론적인 책들은 그렇지 않다.

사실 다카시는 나름의 내공을 축적한 학인이다. 인문학 저작으로서는 제법 많이 팔린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이 해제를 써준 것으로 눈길을 끌기도 한 기억이 난다. 그의 전공이 교육심리학이기에 역사 분야에 대한 저술도 일종의 외도인 셈이다. 하지만 달리 보자면 그의 박람강기를 증명한다. 나는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실은 그렇기에 더욱 상황이 답답하다.

필자가 다카시(를 나아가 그를 소비하는 현상)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간단하게 답해보자. 사이토 다카시는 과거 팔이에 맛 들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성공의 비결로 재가공해 자기계발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물론 그가 오늘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을 과거의 경험에서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이 지점에서 그는 더 이상 학자로서의 기준에 부합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복제는 성공의 비결이 될 수 없다

사이토 다카시는 자신의 30대를 어렵고 힘든 시기이자,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를 형성하고 축적하던 시기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가령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의 부제는 “서른 살 빈털터리 대학원생을 메이지대 교수로 만든 공부법 25”이다. 독서가 그의 30대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비결인 셈이다. 좋다. 그렇게 놀라운 비결도 아니고,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모두가 독서로 빈털터리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던 18살부터 30대 초반까지 십여년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길렀던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성장에 도움을 주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다카시는 자신의 성공의 비결로 청년기의 독서에 청년기의 고독을 얹기 시작한다. 고독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주장에 이르니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또한 <가난의 힘>에서 다카시는 젊은 시절에 가난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경험에 깊이를 더했다고 이야기한다. 가난을 미래의 에너지로 바꾸라고 그는 독려한다(책의 부제가 “일본 최고의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가 전하는 가난을 에너지로 바꾸는 열 가지 기술”이다). 이것 또한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이제 정말로 동의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가난의 힘>은 전통적 자기계발서와 다소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카시가 가난의 사회구조적 차원을 인정하면서도 마음가짐의 차원을 강조하는 것이 못내 걸린다. 가난을 끝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막막하겠지만, 인생 가운데 잠깐 스쳐지나가는 지점으로 생각하면 밝고 긍정적으로 가난을 대할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과연 가난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지점에 불과할 지가 전혀 확실하지 않다.

독자의 각성이 필요하다

사이토 다카시는 자신의 과거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라고 우리를 호도하는 셈이다. 사실 이에 대해 더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에 대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한 주제의 책을 써온 저자”라고 출판사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카시를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이 부당할 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시장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상품을 가공한 것일 뿐이다. 단지 지나치게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사이토 다카시가 쓴 책들을 그저 입맛에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집어 들지 말고 그가 전에 어떤 책들을 써왔는지 정도는 알아봐야 한다. 다카시의 학자로서나 저자로서의 역량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의 모든 저작들을 다 인정할 수는 없다. 신도들의 욕심이 성직자를 일그러뜨리듯이 독자들의 욕망이 작가를 타락시키기 십상이다. 독자의 각성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