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

“내정은 장소한테 맡기십시오.”

194년, 용맹함이 그 옛날 서초패왕(西楚霸王)이었던 항우에 버금간다고 하여 소패왕(小霸王)이라고 불리던 손책은 강동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이 지역에서 기반을 잡으려했다. 이 때 손책의 참모는 주유였다. 주유가 말했다.

“큰일을 하시려면 이 지역의 명사인 두 명의 장씨(張氏)를 쓰셔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누구고, 어떤 사람인가?”

“한 사람은 팽성 출신의 장소(張昭)이고, 한 사람은 광릉 출신의 장현입니다. 둘 모두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큰 재주를 지녔습니다.”

손책은 사람을 보내 장소와 장현을 초빙하려 했다. 이 둘은 명성이 있는 선비였다.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손책이 직접 찾아가서 예를 갖추니 그제야 수락했다. 손책은 둘 중에서 특히 장소를 아꼈다. 장소에게 무군중랑장이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장소는 손씨의 사람이 됐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0년, 손책은 조조와 원소가 싸우는 틈을 타서 조조의 본거지인 허창을 습격하려 했다. 그런데 출병을 하기 전, 조조와 내통하고 있던 허공이라는 사람을 죽였다. 허공의 식객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늘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손책은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손에 죽었다. 손책은 죽기 전, 어머니한테 이렇게 유언했다.

“내정에 어려운 일이 있거든 장소한테 물어서 결정하게 하십시오.”

손책의 뒤를 이은 사람은 동생인 손권이었다. 이 때 손권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손권은 형이 죽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픔에 겨워 울기만 했다. 장소가 말했다.

“바야흐로 천하는 혼란하여 도적이 산에 가득한데, 당신은 어찌해서 자리에 누워 슬퍼하며, 보통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겁니까. 형의 장수들을 다스리시고, 군대의 큰일을 장악하셔야 합니다.”

장소는 손권을 부축해 일으켜서 말을 타게 하고, 열병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아울러 손권의 숙부를 시켜 손책의 장례를 맡도록 했고, 손권을 자리에 앉힌 후, 신하들의 인사를 받게 했다. 이러한 장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손권의 진영은 짧은 시간 만에 안정됐다. 손책이 장소를 아꼈던 이유가 이 일화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장소는 어떤 사람이었나? 장소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서예에 뛰어났다. 여러 서체 중에서 예서(隷書)에 능했다고 한다. 백후자안(白侯子安)이라는 사람한테 『춘추좌씨전』을 배웠다고 하니 유학을 공부한 선비라고 하겠다. 이 외에도 많은 책을 읽어 명성이 있었다. 스무 살 때 효렴(孝廉, 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을 지역의 태수가 조정에 추천해 주는 벼슬)에 뽑혔지만 나가지 않았다. 이후 서주자사였던 도겸이 장소를 선발했지만, 장소는 역시 나가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옥고를 치렀지만, 친구가 백방으로 노력해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 보면 장소는 책략가 보다는 내정에 종사하는 문관에 가까운 사람이며, 감옥에 갇히면서도 벼슬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만류만 하는 사람

손권은 조조와 유비에 가려져 어중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성격이 호탕하고, 무예를 좋아했다. 말을 타고 다니면서 호랑이 사냥을 하곤 했는데, 어떤 때는 호랑이가 앞에서 달려들면서 말안장을 할퀴는 일도 있었다. 장소가 급히 말했다.

“장군께서 이처럼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군주는 영웅을 부리고 현명한 사람을 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들판에서 맹수와 겨루십니까?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인데 왜 이러십니까?”

손권은 사과했다.

“내 나이가 적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소. 그대에게 부끄럽소.”

이렇게 말은 했지만, 손권은 좋아하는 호랑이 사냥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해서 호랑이 사냥을 다녔다. 그 때마다 장소는 그만두라고 진언했지만, 손권은 웃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년, 손권은 지난 192년 황조와 싸우다 죽은 아버지 손견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 손권은 장소와 주유를 불러들였다. 장소가 말했다.

“손책 장군이 돌아가신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상중에 군대를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주유는 장소의 의견에 반대했다. 손권은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황조의 진영에 있던 감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황조를 치기로 결정했다. 명분을 내세우던 장소는 머쓱해졌고, 이후 손권은 208년에 황조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같은 해 조조는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항복을 받고, 형주지역을 점령했다. 형주의 수군(水軍)을 차지한 조조는 손권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군사력 면에서 손권은 조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간다. 이 때 유비의 참모였던 제갈공명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손권과 힘을 합해 조조와 싸울 계획을 세웠고, 손권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소는 펄쩍 뛰었다. 급히 손권을 찾아갔다.

“주군께선 스스로 판단했을 때 원소와 비교해 어떻다고 보십니까? 조조는 원소보다 군사력도 약하고, 장수가 적었을 때도 원소를 이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조조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볍게 그들과 대적하겠습니까. 주군께선 제갈공명의 허튼 소리를 듣고 군대를 움직이려 하십니다. 이건 짚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장소의 말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손권은 고민에 빠져서 잠을 못 잘 지경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의 이모가 손권을 찾아왔다.

“안의 일은 장소와 의논하고 밖의 일은 주유와 의논하라는 어머님의 유언을 잊은 게냐?”

손권은 주유를 불러들였다. 유명한 ‘적벽대전’이 시작됐고, 조조는 크게 패해서 얼마간 남쪽을 넘보지 못했다. 이처럼 장소는 큰 변화보다는 안정을 꾀했던 사람이었다. 이후로도 장소는 손권이 무슨 일만 벌이려 하면 사사건건 만류했다. 손권은 형인 손책과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장소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하면 멀리하려고 했다.

221년, 장소와 손권은 크게 부딪혔다. 그간 쌓였던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요동지역의 공손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는 손권에게 항복을 하겠다고 사신을 보내왔다. 손권은 기뻐하면서 답례 사절 두 명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장소가 말했다.

“공손연은 위나라한테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공손연이 마음을 바꿔서 위나라한테 자기 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우리 진영의 두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손권은 화가 나서 칼을 만지면서 장소를 을렀다.

“우리나라 신하들은 궐 안에 들어오면 나한테 절을 하고, 궐을 나서면 당신한테 절을 합니다. 나 역시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러 번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욕했고, 나는 늘 계책을 잘못 세울까봐 염려해야 했소!”

손권은 장소의 간언을 무시하고, 기어코 요동에 두 명의 사절을 보내버렸다. 장소는 분해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손권 역시 화를 내면서 장소의 집 대문을 흙으로 봉해버렸다. 그러자 장소도 안에서 문을 흙으로 발랐다. 그런데 장소의 말대로 요동으로 간 두 사람이 죽어버렸다. 손권은 장소를 위로하면서 수차례 조정으로 불렀지만, 장소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손권은 장소를 직접 찾아가서 문 앞에서 불렀다. 그래도 장소가 나오지 않자, 손권은 문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 모양을 본 장소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고 손권을 뵙게 하자, 장소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조정에 나가게 됐다.

그래도 나라를 버리지 않고

장소는 내정에 장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작전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조심하다가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막아버리는 결과가 있기도 했지만, 이 사람의 성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문관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주인이 자기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융통성을 발휘하는 게 좋은데 장소는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끝까지 반대를 했다. 손권으로선 무척 피곤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소의 말 속에는 ‘사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장소의 간언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장소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공격했을 때, 육손의 취임을 반대했다. 육손은 ‘경험이 없고, 명성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장소의 식견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에 모험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장소는 여몽을 추천했고, 명재상 고옹을 알아보고 추천할 만큼 사람 보는 눈도 있었다.

장소는 검소한 사람이었다. 평생 손씨를 위해 일하면서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죽으면 기름칠을 하지 않은 평범한 관을 쓰고, 시신을 염할 때도 별도로 수의를 짓지 말고 평상복으로 염을 하라고 유언했다. 장소가 죽자, 손권은 그의 뜻에 따라 소박한 옷을 입고 와서 조문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는 장소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장소는 손책의 유언에 따라 임금을 보좌하고 공을 세우고 충성했으며, 직언을 하되 자신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한 태도 때문에 손권이 그를 꺼렸고, 고상한 행동 때문에 손권과 소원해져 재상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조용히 집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로보아 손권이 손책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손책이 살아 있을 때 장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일 동생 손권이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당신이 스스로 권력을 취하도록 하시오.”

그래도 장소는 손권을 버리지 않았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고 죽었다. 조심스럽고 고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한다.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

독립운동가 집안의 모범생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자신보다 집안의 명성이 훨씬 높은 사람이다. 이종걸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이다. 이회영 선생은 유명한 해공 신익희 선생과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이종걸의 작은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다. 보수정당인 민정당, 민자당에서 정치를 했던 이종찬은 그의 사촌 형이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 이종걸은 장소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재주를 지닌 학생이었다. 처음엔 서울의 예원학교에 입학해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나, 자신의 길은 예술보다는 인문계통이라 생각해서 3학년이던 시절 인문계 고등학교 입시준비를 해서 서울의 명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77년, 성균관대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으나 자퇴를 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87년,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대 법대로 편입을 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울대 재학시절에 사법시험을 준비해서 1988년에 합격을 했다. 그야말로 ‘공부의 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대로 성장했더라면 이종걸은 지금쯤 존경받는 법조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립운동가 가문의 후광을 지닌 데다 자신의 재능 역시 그에 맞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시대상황이 이 모범생을 그냥 두지 않았다. 차분한 성격을 지닌 이종걸은 경기고 재학시절 박정희의 독재에 의분을 느껴 친구들과 함께 ‘귀 있는 자 들으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교실과 복도에 뿌렸다. 이 일을 시작으로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학생운동에 가담해 서울 종로 경찰서 학생담당 정보과 형사의 요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 야학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는데, 결국 이런 일련의 일들이 빌미가 돼 이종걸은 학변자(특수학적 변동자, 운동권 학생이 검거되면 바로 군대에 징집하여 학적을 ‘재학’에서 ‘휴학’으로 바꿔버린 데서 만들어진 명칭)로 군대에 징집됐다.

이후 병역을 마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역시 비교적 무난한 길이라 할 수 있는 판검사를 선택하지 않고, 변호사 준비를 했다. 이 때 현 서울시장 박원순과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일원으로서 서울대 민족활동가 사건, 천주교 기독교 애청사건, 박노해, 백태웅 등의 사노맹사건, 유서대필사건, 중부지역당사건, 범민련사건, 전민학련, 전노협사건, 한청연사건 등 많은 시국 관련사건 및 인권관련사건을 도맡다시피 했다.<이상, 이종걸 공식 홈페이지 내용 발췌수록>

“명예와 명예욕을 잘 구분해서 ‘명예와 실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치를 시작할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흠집 없이 살아온 집안의 역사를 더럽히게 되면 조상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명예를 지키라는 말씀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럴 경우 목숨을 거는 항쟁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대의를 위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후대의 평가받기 위한 욕심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2010. 2. 26. 판판뉴스>

모범생에서 운동권 학생으로 인권변호사이자 시민활동가로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던 이종걸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 안양 만안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스스로 밝힌 대로 ‘명예와 실질을 추구하는 것’, ‘집안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 이종걸의 정치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지만, 시대상황이 변한 지금, 자신은 문관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2016년 1월 현재, 이종걸은 우리나라 제1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로 있다.

당대표와 사사건건 충돌하다

이종걸은 경기 안양 만안구에서만 4선에 성공한 더불어민주당의 중진의원이다. 공약이행률 경기도 1위를 했으니 ‘명예와 실질’을 동시에 얻었다고 할만하다. 지표로만 보면 일을 잘하는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중들의 이종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하다.

“문 대표와는 어제도 만났는데 생각이 변한 것이 없더라. 문 대표도 그렇고 조경태 의원도 그렇고 부산 마이너리티들이 고집이 대단하다.(…) 부산 개혁파가 여의도랑 언어가 다른 것 같다. 과연 부산 개혁파가 여의도 바꿀 힘이 있느냐.(…) 노무현 대통령도 언어마찰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후단협(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도 생기고 그랬다.”<2016. 1. 7. 오마이뉴스>

이종걸은 안철수와 김한길, 이른바 ‘비주류’라 불리는 두 사람이 탈당하자 당대표인 문재인을 겨냥해 이와 같은 폭탄 발언을 뱉고 말았다. 아군의 이탈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냈다고 하더라도 자당의 당대표한테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주군을 ‘원소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조조한테 항복하자고 했던 장소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이 일 뿐 아니라 이종걸은 사사건건 당대표와 충돌했다. 2015년 12월, 광주 광산(갑) 지역구의 3선 의원인 김동철이 탈당했다.

“(…) 이건 호남 민심이 이반되고 있다는 것의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되고 있는 것이고, 다른 동료 의원들에게 탈당에 대한 거부감, 이런 것들을 던져버리고, 그런 비난이 상쇄되어서 탈당 동조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 민심이 악화되는 신호탄이 될 수 있고, (…) 아주 엄중하고 무겁게 생각해야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한길 대표도 지금 문재인 대표와 지도체제에서 최근에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 이후에 하고 있는 수습방안은 결코 당의 통합을 위한 수습방안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2015. 12. 21. YTN 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종걸이 생각하는 ‘수습방안’은 무엇인가. 이종걸은 자신의 원내대표 자리를 걸고 이렇게 말했다.

“승리의 길이 있다면 전력을 다해 그 길을 추진해야 한다. 그건 우선 문 대표의 2선 후퇴와 통합적인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그리고 그 비대위 책임 하에 당의 미래를 결정해 통합, 대통합의 여지를 확신의 가능성으로 만드는 것 (…) 당 대표를 중심으로 한 대다수 최고위원은 분열을 조장하고 당초 제가 ‘최고위에 불참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이유인) 당의 흠결과 진영싸움에서 더 나아가 대통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2015. 12. 17. 연합뉴스>

당대표인 문재인이 사퇴하고, 비대위를 구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선출된 당대표한테 ‘분열을 조장한다’고 한 말은 적절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문 대표는 호남에서 그렇게 (지지율이) 떨어지는데도 전국 지지율이 오른다. 참 신기하다.(…) 선대위원장에게 선거 관련 전권을 줘도 문 대표 휘하에 있는 것이다. 문 대표가 안 물러나면 여전히 ‘문재인당’인 것 (…) 안(철수) 의원은 생각이 결정되면 요지부동이다. 문 대표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2016. 1. 5. 연합뉴스>

이종걸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 쯤 되면 문재인이 모욕감을 느낄 만도 할 것 같다. 이종걸은 말만 이렇게 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통합여행’을 한다고 선언한 뒤 당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문을 흙에 발라 버리고, 문에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던 장소의 고집스러운 모습과 일치한다. 결국 문재인은 당대표직을 내려놓고 김종인에게 전권을 이양하고 평당원 신분으로 돌아갔다.

“문재인호 최고위 승선은 저에게 값진 경험이었다.(…) 더 지혜로운 길에서 만날 것을 확신한다. (…) 때론 쓴 소리로, 때론 독자 행보로 당을 위한 문제를 제기할 때 문 대표, 최고위원, 당원동지 여러분들이 불편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더 강해지고 국민에 대한 충정을 가졌다는 넓은 이해로 용서해주길 바란다. (…) 선배들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문 대표와 최고위원들 앞길에 영광 있기를 바란다.”<2016. 1. 27. 뉴스1>

이종걸은 장소처럼 ‘어쩔 수 없이’ 당으로 돌아온 것인가. 아니면 당과 국민에 대한 ‘충정’ 때문에 돌아온 것인가.

할아버지의 명예를 온전히 하는 길

당대표인 문재인과의 충돌 때문에 이종걸은 민주당 지지자에게 ‘분열을 조장하는’ 캐릭터로 낙인찍힌 점이 있다. 충돌하는 과정에서 말을 거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해 버렸으므로 ‘다선 중진의원’ 또는 ‘원내대표’로서 지녀야 할 품격을 잃어버린 일도, 지지자들에게는 곱지 않게 보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래서 이종걸에게 ‘탈당하라’는 말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종걸의 조금은 거칠고 직설적인 태도를 옆으로 놓아두고 본다면 이 사람이 반드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어찌되었건 아군의 전력누수를 막으려 했고, 시비에 대한 평가를 떠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당의 분열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식견이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외하면 오히려 이종걸은 민변 변호사 시절부터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남들이 맡기를 꺼려하는 사건, 엄중한 시국사건을 도맡았고,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초석을 다졌으며, 유명한 ‘장자연 사건’을 세간에 알린 사람이 바로 이종걸이 아니던가. 결정적으로 이 사람은 여전히 더불어민주당의 의원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그간의 크고 작은 문제는 덮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당원이나 지지자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문재인과 이종걸의 사이에 참으로 많은 곡절이 있었으므로 이 둘의 사이에 아직 앙금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혼재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게다가 김종인 선대위원장은 원내대표인 이종걸을 선대위에서 제외했다. 이를 두고 안철수의 국민의 당에서는 ‘탄핵’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을 공격하며 이종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보수언론에서도 이를 문제 삼는 논평을 꾸준히 내고 있다.

“남은 76일 총선기간 동안 헌신에 또 헌신을 다하겠다. (…) 우리 김종인 위원장의 비대위가 성공해야만 우리 당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이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비대위원님들의 결단에 감사드린다. (…) 지난날의 이질적인 정치경험들을 부단히 결합시켜 화합을 통해 승리의 조력자가 되겠다.”

이종걸은 ‘명예와 실리’를 추구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제로서 ‘명예’를 지키는 길은 한 곳에 머물면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정계를 떠나는 그날까지 사적인 욕심에 좌우되지 않고 할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잃지 않아야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실리’는 무엇인가. 원내대표로서 거대여당과의 협상에서 주눅 들지 않으면서도 얻을 것을 지혜롭게 얻어 내는 일이고, 무엇보다 총선에서 거대여당의 독주를 막아내는 결과를 얻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종걸의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 선생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종걸 역시 이렇게 말한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삼국지인물전> 외 5권

“국민이 염원하는 희망의 정치의 밀알이 되겠습니다.”<이종걸 공식 홈페이지>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채우지 않았던 할아버지, 그리고 장소처럼 이종걸 역시 그러하기를 희망한다. 문재인이 말한 것처럼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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