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동주>가 자박자박 흥행가도를 걷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도중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불과 스물여덟의 나이로 옥사한 시인 윤동주의 짧은 생애가 영화를 통해 정연하게 재현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미덕은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윤동주의 시를 일제치하의 괴로운 장면들과 함께 읽음으로써 그의 시가 머금고 있는 간단치 않은 무게와 깊이를 시각화했다는데 있다.

예컨대 옥에서 생체실험의 일환으로 정체불명의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으며 각혈을 하는 와중에 흘러나오는 「별 헤는 밤」의 육성은 각별히 가슴에 와 박힌다. 옥창 너머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채 남은 청춘을 저버리고 스러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시 또한 달리 읽힐 수밖에 없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고 별 하나 셀 적마다 하나씩 가지런히 대입한 단어들의 실체를 시인은 얼마나 간절히 희구하였겠는가.

그의 시가 외견상 드러내는 서정성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적 가치관에 귀의했던 시인의 청빈한 지성과 고요하고 점잖은 성품의 발로일 뿐, 정작 그 내적인 고뇌의 밀도는 간단치 않았으리라. 영화로 재구성된 그의 생애는 이를 충분히 가늠하게 해준다. 그의 사촌인 동시에 막역한 친구였던 송몽규와 얽힌 일화들이 특히 그러한데, 윤동주와 달리 심성이 담대하고 활동적이었던 송몽규는 중학시절부터 독립운동 진영에 가담하는가 하면 일본 유학시절에도 유학생들을 소집해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행동가였다. 시대와 대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송몽규를 향한 윤동주의 감정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6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어진 시」)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민족성을 돌려받기 위해 기꺼이 싸우지 못하는데서 느끼는 부끄러움으로 고스란히 직결된다. 즉 이 부끄러움은 시인의 존재 안팎으로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이란 맨살에 닿는 까끌까끌한 속곳처럼 대단히 민망하고 사실적인 것이었으리라. 그가 읊는 부끄러움은 애초에 우리가 일상에서 단순히 수사적으로 내뱉는 부끄러움과는 그 층위를 달리 한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서정성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가 그만큼 사변에 매몰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시인은 시대의 바람에 흔들리고 내면의 동요에 나부끼는 속곳, 자신의 부끄러움을 시로 옮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는 영화중의 대사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바다. 윤동주는 시대와 자아 사이를 고통스럽게 드나드는 바람을 귀 기울여 읽고 쓰고자 했고, 바람에도 결코 떨지 않는 별들을 헤아리고자 했으며, 그 별들이 아롱진 하늘을 우러르고자 했다.

그러니 우리는 시인의 부끄러움 앞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스스로 당대와 맞대어 있음을 읽어내고 쓰는 일을 짧은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시인의 정신은 실상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건만, 이는 오늘날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자신을 읽을 줄은 알지만 차마 쓰지는 않는 이, 혹 읽을 줄도 모르면서 쓰기만 하는 이, 아예 그 중 어느 것도 하지 않는 이들, 나아가 하지 않으려는 이들로 주변이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불과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시인을 따라 세상을 정직하게 읽고 정직하게 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를 충분히 기릴 수 있다. 윤동주의 서정성은 당대로부터 스스로 느끼는 바를 기만하지 않는데서 유래했다. 그러한 서정성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화급히 요청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직하게 읽고 정직하게 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덜 부끄러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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