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달빛이 쏟아지는 늦은 밤, 서울 양재동에 자리한 화훼공판장으로 화려한 꽃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판장 내부는 전국 각지에서 새벽공기를 머금고 달려온 생화로 가득했다. 2층에서 내려다 보니 꽃으로 둘러싸인 사잇길이 마치 ‘미로’를 연상케 했다.

저녁 10시 40분쯤 지웅식 씨 부부가 충혈된 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씨는 아내 김모씨와 함께 화훼공판장에서 생화매장을 운영하는 ‘아름원예’ 대표다. 동시에 화훼공판장 중도매인연합회 회장직도 겸하고 있다.

부부는 도착하자마자 공판장을 돌며 박스 안에 쌓인 꽃을 훑어보았다. 지씨는 양손에 수첩과 펜을 쥔 채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아내와 의논했다. 두 사람은 걸으면서 종이 박스에 담긴 꽃을 꺼내 꼼꼼히 살폈다. 시곗바늘이 자정에 이르자 여러 중도매인들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경매 시작 전 절차는 대략 이렇다. 농가에서 꽃을 출하한 뒤 공판장으로 옮겨져 검수가 이뤄진다. 이어 꽃에 등급 판정과 상장번호가 부여되고 중도매인이 상품을 확인한다.

생화 경매는 1월에서 5월에는 매일 자정에, 6월부터 12월은 월‧수‧금 자정에 실시한다. 경매는 1시간에 평균 500건 정도 진행되는데 마치는 시간은 새벽 2시 30분~3시 사이. 중도매인은 이틀에 한번씩 열리는 생화 경매에서 꽃을 대량 구매한다. 따라서 경매에 참여하려면 1~2시간 전부터 나와 구매할 꽃을 메모해야 한다.

메모를 마친 지씨 부부는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마시며 경매를 기다렸다. 기자에게도 뜨거운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커피를 마시던 지씨는 중도매인마다 꽃을 보는 눈과 기준은 다르다며 입을 열었다. 어떤 주문이 들어오는지, 어떤 꽃이 잘 나가는지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가격도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조화가 많아지는 바람에 생화 가격이 내려갔다며 지씨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부부는 낮과 밤이 바뀐 채 20년째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적응은 안 된다고 했다. 17시간 근무를 하느라 생체리듬이 깨져 피로도가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후 1시에 일을 마치므로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건강을 잃으니까 남보다 돈을 두 배는 더 벌어야 해요.” 지씨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씁쓸해했다.

자정이 되자 중도매인들은 자신의 단말기를 가져온 뒤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는 응찰기 200여 대가 놓여져 있었고 앞에는 전자식 전광판 2대가 있었다. 공판장 내부에 울려 퍼지는 ‘하잇, 낙찰~’ 소리가 경매 시작을 알렸다. 곧이어 한 관계자가 경매에 나온 꽃을 들고 보여줬다. 전광판 앞으로는 꽃을 담은 수레가 차례로 움직였다. 바로 앞에 놓인 전광판에는 액수가 나왔고 때때로 ‘유찰’이 되기도 했다. 유찰이란 살 사람이 없어 경매가 취소된 걸 의미한다.

   
 

지씨는 손에 단말기를 움켜쥐었고 시선은 전광판에 가닿았다. 한 손으로는 뭔가를 적거나 전화 통화를 했고 시세를 알아야 하기에 경매 진행 상황을 눈여겨봤다. 이는 주변 상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씨는 고객 중에 화훼장식기능사 시험을 보는 학생이 있어 ‘질 좋은 장미’를 사야 한다며 포부를 다졌다. 만약 이번 경매에 나온 꽃이 비싸면 다른 날에 구매할 생각이다.

경매에 참여할 때는 졸음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원하는 꽃을 적절한 금액에 선점하기 위해선 신경을 바짝 쓰지 않으면 곤란하다. 전자식 경매의 성격상 버튼을 늦게 누르면 원하는 꽃을 사지 못한다. 필요한 생화를 원하는 가격에 사지 못하면 차선책도 고민해야 하므로 머리와 손은 쉴 틈이 없다. 옆자리에 앉은 한 상인이 지씨에게 틈틈이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다.

   
 

“아이참~”

경매에 실패한 일부 상인의 입에서 이따금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화는 제주도부터 밀양, 파주, 전주, 포항 등 전국 각지에서 왔고 카네이션, 장미, 프리지어, 라눙쿨루스 등 다양했다. 장미 역시 오션송, 엑설런트, 리바이벌, 사샤, 푸에고 등 종류가 많았다.

지씨가 처음부터 생화 중도매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빌려준 돈을 받으러 왔다 우연히 이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가 중도매인연합회를 대표하는 회장까지 하게 됐다. 일이 끝나면 쉴 법도 한데 오후 1시 이후가 되면 회원을 위해 일한다. 중도매인을 위한 환경이나 여건이 열악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지씨는 중도매인을 위한 공판장 내부 복지시설 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아내 김씨는 5개월 전 어깨 수술을 했다. 의사가 6개월 정도 일을 쉬라고 했지만 2주 만에 가게에 나와야 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지씨는 필요한 꽃을 다 구매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로 향한 그는 경매장에서 산 박스에 든 꽃을 신문지에 싸며 정리했다. 옆 가게에서 라디오를 켰는지 신나는 음악이 들려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아내 김씨는 직원과 함께 꽃을 보기 좋게 진열했다. 또 손님을 응대하거나 꽃에 수시로 물을 뿌렸다.

지씨는 유독 꽃을 팔 때 당당한 목소리를 냈다. 이유를 묻자 “품질로 승부를 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매를 할 때도 적은 가격에 사기보다 농민을 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하려고 노력한다. 질 좋은 꽃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따라서 품질에 대한 타협이 없을 수밖에.

지씨는 “우리 고객을 실망시키지 않고 농락하지 않으려 한다. 내 손님을 만들기 위해선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에게 믿음을 못 주면 우리집에 안 온다’는 게 부부 나름의 경영철학이다. 늘 가슴 속에 ‘정직’이라는 단어를 깊이 새기고 일하기에 믿음 없이 산 꽃을 손님에게 권할 수 없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교회 손님이 가게를 많이 찾는다. 지씨 가게는 리시안이 주 품목이고 요즘 시기에는 라눙쿨루스, 프리지어가 잘 나간다. 장미는 사계절 내내 나오고 손님이 많이 찾으므로 항상 인기가 좋다. 중도매인이라면 종류를 비롯해 꽃에 관한 각종 정보는 꿰뚫고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거저 되는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경험 부족으로 꽃을 팔지 못하고 버리는 일이 허다해 속이 쓰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마다 김씨는 교회에 가서 꽃을 버리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걸까. 유명 호텔에 꽃을 팔기도 하고 연매출 1등을 하는 영광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는 초창기 3년간 매일같이 공판장 문을 밟으며 경매를 배운 남편 지씨. 그리고 서글픔을 참고 남들 잘 때 일한 아내 김씨의 값진 열매였다.

   
 

꽃집을 운영하는 소매인은 생화매장에 보통 이른 아침인 6시 이후에 몰린다. 새벽 4시가 넘자 꽃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김씨는 어머니를 사드리고 싶다는 한 남성의 모습이 예뻐서 튤립 한 다발을 공짜로 줬다. 그는 이 남성처럼 꽃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꽃을 사치품, 소모품이라고 생각하는 세태에 마음이 아프다고도 했다.

가격을 터무니없이 깎아달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곤욕이다. 소위 말해 눈높이는 하늘에 있으면서 주머니는 바닥에 두는 손님 말이다. 보통 싱싱하고 좋은 꽃일수록 가격이 높은 게 일반적. 그러므로 질 좋은 꽃을 위해선 그만큼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게 부부의 생각이다.

   
 

김씨는 “생화는 살아있고 조화는 흉내 내는 느낌”이라고 얘기했다. 생화 특유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플라워 테라피(flower therapy)’라고 해서 심리치료도 한다고 하니 그 말이 과장은 아니리라.

오전 6시, 한쪽에 있는 1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서 김씨가 다리를 펴고 앉았다. 1인용 침대 크기만 한 곳이었는데 이곳에는 전기가 들어와 따뜻했다. 담요를 덮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김씨는 밥을 지어야겠다며 일어섰다.

메뉴는 각종 밑반찬을 비롯해 돼지고기볶음과 된장국이었다. 김씨가 밥을 다 차리자 옆집과 앞집에 있는 남자 상인 대여섯 명이 몰려들어 식사했다. 주변에 음식을 사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이렇게 자주 먹는다. 보통 손님이 없을 때 밥을 먹어야 하기에 식사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아침 식사를 마친 부부는 오후까지 노동을 이어갔다. 지씨는 꽃을 정리하거나 계산서를 작성하고 휴대전화로 꽃 사진을 찍어 소매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아내 김씨는 상한 꽃잎을 떼어내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쓸어 담기를 반복했다.

20년 동안 자리를 지킨 지씨 부부는 이 세월에 하루를 더한다. 두 사람은 오늘도 손님들에게 꽃을 건넨다. 부디 자식 같은 꽃이 버려지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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