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어떠한 것을 비교할 때 보통 사람들은 공통점을 확인하면서 유대감을 가지고, 차이점을 확인하면서 상대방을 적대시 하는 경우가 많다. 학계에서도 비교는 매우 중요한 연구 방법 중 하나인데, 학계에서의 비교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두 중요시 여기면서, 비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어야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학계에서 해당되는 전제조건은 아닐 것이다.

신돈과 홍국영.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시대적으로 신돈은 고려 말의 인물이고, 홍국영은 조선시대 인물이다. 또한 신분상으로 신돈은 승려였고, 홍국영은 유신(儒臣)이었다. 차이점을 보면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게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공통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대중적으로 드라마를 통해서 꽤 유명해진 역사 속의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신돈의 경우 손창민 씨가 연기했던 모습이 아직도 짤방(‘짤림 방지’의 줄임말이다. 사진이나 동영상 전용 게시판에 사진이나 동영상이 아닌 글을 올렸을 경우 삭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용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김기란, 최기호, 『대중문화사전』, 2009.)으로 인터넷 상에 등장하고 있다. 홍국영의 경우 1990년대 전후부터 많은 역사 드라마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당대 개혁 군주의 측근에서 함께 개혁을 위해 활동했다는 것이다. 신돈이 보좌했던 고려 공민왕과 홍국영이 보좌했던 조선의 정조는 각 왕조에서 개혁군주로 유명한 왕들이다. 공민왕은 고려 말,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바로잡기 위해서 외교적으로는 원(元)을 배척하고 명(明)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적인 이익을 취했던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을 견제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공민왕의 곁에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자 노력했다.

홍국영이 보좌했던 정조도 조선 후기 개혁 군주로 유명하다. 숙종 대부터 그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던 조선 후기의 중흥을 가장 절정으로 이끌었던 왕으로, 문치(文治)의 부흥을 위해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했고, 군제를 개편해 군사력의 강화도 추구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 극에 달하면서 시작과 달리 그 폐해가 더 커졌던 붕당(朋黨)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발전시켰다.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부터 정조 곁에서 정조를 지켜줬고, 정조 즉위 후 정조의 손발이 되어서 그의 개혁을 실행했다.

신돈과 홍국영이 가진 공통점 중 최근 우리에게 가장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은 ‘그들이 모시던 군왕 뒤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다가 그들이 모시던 군왕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성희는 『고려사(高慮史)』의 기록을 빌어서, ‘신돈은 공민왕과 마치 허물없는 친구처럼 행동했으며 선왕이나 왕후의 능에 배알할 때 백관이 모두 왕을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도 신돈만은 홀로 우뚝 서 있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또한 사심관(事審官. 고려 시대에,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의 일에 관여하던 벼슬아치. 각 지방의 호족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을 이루기 위해 둔 것으로,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임명할 수 있었고 그 지방의 치안을 책임졌다. 자료: 국립국어원) 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이 그 지위에 오르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정성희는 신돈이 승려로서 할 수 없는 행동들도 자행했다고 전했다.

홍국영 역시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많은 권력을 손에 쥐고, 심지어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입궁시켜서 외척(外戚)이 되고자 시도했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초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도승지, 대통령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숙위소 대장,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을 겸직해서 정조 주위의 문무(文武)를 모두 장악했다. 심지어 1778년(정조 2) 홍국영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원빈(元嬪) 홍씨다.

그 결과 신돈과 홍국영은 각각 공민왕과 정조에게 숙청을 당했다. 신돈의 개성 천도 주장과 사심관 등극 시도 등 때문에 공민왕은 신돈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신돈은 이것을 알아차렸고, 공민왕 시해를 시도했으나, 발각됐고, 체포돼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참살당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누이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정비(正妃)인 효의왕후를 근거없이 의심했고,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했다. 이것은 결국 왕실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홍국영을 미워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또한 홍국영이 정조의 신임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도 사람들이 돌아서게 하는 원인이 됐다. 결국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지 7년이 되던 날 홍국영에게 궁으로 오라고 지시했고, 홍국영은 궁에 와서 사직을 청했으며, 정조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자진사퇴의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조에게 축출당한 것이었다. 이후 홍국영은 울분에 쌓여서 술로 세월을 지내다가 서른 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신돈과 홍국영에 대한 기록은 그 반대 세력에 의해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무리 개혁적인 군주라도 왕의 신임을 이용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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