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한센인의 한 세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전남 고흥 ‘소록도’

   
▲ 소록도 전경 ⓒ뉴시스

일제시대, 한센병 환자 소록도에 강제 수용돼
강제 노역, 단종·낙태 수술 등 인권유린 단행

해방 이후, 우리 정부 다를 바 없어
90년대까지 이어진 한센인 인권탄압

한센인, 우리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정부의 잘못 인정·진심 어린 사과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한반도 끝자락에는 어린 사슴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소록도’라는 작은 외딴섬이 하나 있다. 울창한 소나무가 우거진 숲과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진 소록도해수욕장, 여러 관상수를 감상할 수 있는 중앙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소록도는 한없이 아름다운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과거 한센인의 아픈 역사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1907년, 일본은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 일명 ‘한센병’이라 불리는 피부병 환자 관리를 위해 대대적인 정책 마련에 나섰다. 그로부터 2년 후 전 국토를 5개로 나눠 한센병 환자를 한 곳에 모아 ‘강제 수용’했다. 1931년에는 나예방협회 설립과 함께 ‘나 예방법’ 개정을 통해 한센병 관리를 국가 차원의 관리 수준으로 격상시켜 국립 요양소를 설치했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일본의 통치 아래 있던 우리나라 역시 한센병 치료와 한센인들로 인한 감염·전염을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자혜의원’, 지금의 국립소록도 병원을 세웠다. 당시 자혜의원에는 약 6000여명의 한센인들이 강제 수용됐다. 그들은 강제 노역뿐만 아니라 단종(斷種)·낙태 수술 등 인권유린을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됐지만 한센인들은 소록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한센병이 유전성과 전염성을 띤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을 단행했으며 이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 국립소록도병원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한평생 감금돼 숱한 억압과 핍박 속에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소록도 어르신들. 그들의 한 맺힌 설움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 기자는 이른 아침부터 소록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8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1시가 돼서야 전남 고흥군 녹동버스공용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10여분 이상 달려서야 비로소 소록도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문득 기자가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소록도를 왔을 때는 배를 타고 들어간 기억이 떠올랐다. 원래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2009년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지금은 차를 타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됐다.

소록도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택시가 섬 입구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과 한적함에 ‘와, 좋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빵빵대는 자동차 경적 소리와 이 가게 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로 지친 정신이 절로 힐링이 되는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 오랜 세월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감금생활을 해왔고 사람과 사회, 국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아온 소록도 어르신들이기에 외부인인 기자에게 다소 폐쇄적일 수 있겠다는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기대 이상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한결 편안해졌다. 소록도자치회 박승주 회장님이 음료수 한 병을 내어주며 소록도의 감사를 맡고 있는 강선봉 할아버지를 소개해줬다. 강 할아버지는 차가 없는 기자를 위해 직접 운전까지 해가며 섬 곳곳을 안내했다.

   
▲ 애환의 추모비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84명의 죽음이 헛되지 않길 바라며...

소록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국립소록도병원’이다. 1916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했으며 ‘중앙나요양소’, ‘소록도갱생원’을 거쳐 지금의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편됐다. 설립 당시에는 한센병 환자의 격리·수용이 목적이었으나 지금은 한센병 환자의 진료와 치료를 담당하고, 치료 후 사회로 나가 구성원으로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직업보도·후생사업 등에 관한 연구에 이바지하고 있다.

병원 앞에는 무참히 학살된 한센인들을 기억하기 위한 ‘애환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소식이 전해지자 병원에서는 운영권 장악을 위해 직원들 간의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에 한센인들은 병원 운영권을 자치회에 넘길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해방 후 7일이 지난 8월 22일 직원들은 협상을 목적으로 소록도 마을 대표 90명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협상은커녕 한센인들을 죽창으로 찌르고 구덩이에 파묻는 등 처참하게 학살했다. 결국 84명이 목숨을 잃고 단 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참사 57년 만인 2002년 8월 22일 84명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길 바라고 전 한센 가족의 인권 회복을 소망하는 마음에서 소록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세운 비석이 바로 ‘애환의 추모비’다.

추모비에는 84인의 이름 하나하나가 새겨져있다. 소록도로부터의 자유라는 또 다른 해방의 꿈을 안고 그곳에 모였을 한센인들. 어쩌면 영원히 잊힐 수 있었던 그들의 이름 석자가 이렇게 추모비로나마 세상에 기억될 수 있음이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 만령당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한 평생 힘들었던 육신, 죽어서도 편치 못해

신생리 뒷산 중턱에는 ‘만령당’이 우뚝 서있다. 만령당은 1937년 한센병 환자의 유해를 나무 상자에 담아 보관하기 위해 세워진 납골당이다. 일본의 보탑을 모티브로 해 만든 이것은 콘크리트로 된 원통형의 몸체에 갓 모양의 지붕을 씌웠다. 지붕 위쪽은 탑의 상륜부와 비슷한 모습이다. 참배객들이 배향할 수 있도록 감실도 마련돼있다. 국립소록도병원은 매년 10월 15일 이곳에 잠든 이들을 위해 합동추모제를 지낸다.

만령당은 한센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을 소록도에 갇혀 살다 생을 마감한 이들의 유골이 안치돼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강 할아버지는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남녀 구분 없이 땅에 묻힌 망자들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땅 파서 구분 없이 막 묻어버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름 석자는 남겨줘야지. 그걸 해주려고 하는데 언제 될지는 나도 몰라”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도 제 몸 한번 편히 쉬이지 못하는 한센인들을 생각하니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만령당에 잠든 한센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사슴 한 마리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 자혜의원 본관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국립소록도병원의 모태 ‘자혜의원’

일제강점기 초기 우리나라는 광주, 부산, 대구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사림 한센병 요양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작아 많은 한센인들을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한센인들을 일정한 장소에 강제 수용할 방침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자혜의원’이다.

자혜의원은 섬 전체 1/5에 해당하는 부지에 세워졌다. 개원을 하고 이듬해 환자 72명 수용을 시작으로 전국의 한센인들을 소록도로 집결시키는 발판이 마련됐다. 본래는 ‘T’자형 건물이었지만 일부가 변형돼 현재는 ‘L’자형으로 남아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을 감안하면 비교적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무실과 치료실, 진료실 등으로 구성된 자혜원 내부를 창문으로나마 둘러보니 어느 곳이 어느 용도로 쓰였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다만 소록도로 들어오는 한센인들의 수에 비해 그 시설은 열악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 하나이 원장 창덕비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건물 맞은편에는 1921년 6월 23일부터 1929년 10월 16일까지 8년 4개월 동안 자혜의원의 2대 원장으로 있던 하나이 젠키치 원장을 위한 창덕비가 세워져있었다. 하나이 원장은 개원 초기부터 강요된 일본식 생활양식을 폐지하고 가족과의 통신·면회 허용, 자유로운 신앙생활 보장 등 한센인들을 내 가족처럼 아끼며 그들을 위해 무던히 힘써왔다. 그의 마음에 감동한 한센인들이 직접 경비를 마련해 ‘하나이 원장 창덕비’를 세운 것이다. 조국도 나를 버린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위해 애써준 하나이 원장에 대한 한센인들의 고마움이 오롯이 전해졌다.

   
▲ 중앙공원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한센인의 한맺힌 눈물과 땀이 일궈낸 ‘중앙공원’

여느 수목원을 방불케 할 만큼 솔송을 비롯해 향나무, 후박나무, 삼나무, 종려 등 잘 손질된 관상수 100여종이 우거져있는 ‘중앙공원’. 소록도를 방문한 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이곳은 한센인들의 한 서린 눈물과 땀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3년 4개월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40년 4월 1일에 완공된 중앙공원은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인들 6만여명이 득량만과 환도, 소록도 주변의 섬에서 암석을 채석해 나르고 일본, 대만 등에서 반입된 나무를 심는 등의 강제 노역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 구라탑(좌), 수호 원장 동상(우)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공원에 들어서면 창을 든 하얀 천사 모양의 ‘구라탑’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구라탑은 미카엘 천사가 창으로 한센균을 무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탑 아래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어 괜스레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구라탑에서 얼마 못가 소록도 역대 병원장 가운데 가장 악질이라 꼽히는 4대 수호 미사히데(周防正秀)원장의 동상이 놓여졌던 자리가 나온다. 수호 원장은 9년이라는 긴 재임기간동안 한센인들을 동원해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했다. 또 이들로부터 강제로 기금을 징수해 1940년 8월 20일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매달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지정해 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다 결국 1942년 6월 20일 감사일 행사 중 한센인 이춘상에 의해 살해됐다. 수호 원장의 동상은 1943년 태평양 전쟁 물자로 징발 철거돼 현재는 단만이 남아있다.

   
▲ 중앙공원 공적비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공원 내에는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이들을 위한 공적비도 세워져있다. 공적비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 수녀와 마가렛 피사렛(Pissarek Margreth) 수녀는 지금까지도 ‘날개없는 천사’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오스트리아 안스브루크 간호학교 출신인 두 사람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자진해서 소록도에 입성했다. 접촉하는 것조차도 꺼려하던 국내 소록도 의료진과는 달리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내고 오스트리아 구호 단체에 직접 의약품 지원을 요청하는 등 한센인들을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어디 하나 한센인들의 애환이 묻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중앙공원을 마냥 아름답게 감상할 수만은 없었다.

   
▲ 감금실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소록도 속 작은 형무소 ‘감금실’

지나가는 사람 머리카락 한 올 보기 힘들 만큼 붉은 벽돌로 높게 쌓아 올린 ‘감금실’. 이곳은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직업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한센인 인권탄압의 상징물이다. 한센인들은 병원장의 판단에 따라 감금실에서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에 처했고 강제 노역이나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에 반항한 수많은 한센인들이 감금실에 갇혀 사망하거나 불구가 됐으며 이곳을 나갈 때는 예외 없이 단종 수술대에 올랐다.

   
▲ 감금실 복도 창문(상), 감금실 방 내부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감금실은 입구부터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복도에 나있는 창문에는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려는 듯 철사가 얼기설기 엉켜있는 쇠창살이 심어져 있었다. 한센인들이 이것을 통해 바라본 바깥세상은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듯 건너편 감금실에 갇혀있는 또 다른 한센인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센인들이 감금됐던 어두컴컴하고 좁디좁은 방에 들어서자 천장 가까이에 위치한 작은 창문으로 빛 한줄기가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한센인들이 쇠창살에 가려진 푸른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 시 <단종대>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복도 한쪽 벽면에는 4대 수호 원장 시절, 그의 명을 거역한 벌로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단종 수술을 받은 한센인 이동씨가 쓴 <단종대>라는 시가 걸려있었다. 25살, 평생의 인연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꿈꿨을 그가 단종대 위해서 느낀 처참한 심정이 담긴 문장 한 줄 한 줄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 검시실 안 해부실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검시실’

한센인들 사이에서는 ‘3번 죽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신 해부,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이다. 감금실 옆에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검시실’이 있었다. 이곳은 사망한 한센인들 검시를 위한 해부실과 검시 전 시신을 모시는 영안실로 사용됐다.

해부실 안에는 당시 사용됐던 검시대와 세척 시설 등이 그대로 보존돼있었다. 시신 해부를 위한 일종의 수술대로 쓰인 검시대 가운데에는 여섯 개의 골이 가운데서 만나 작은 구멍을 이루고 있다. 이 골을 통해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를 구멍으로 모아 아래의 파이프로 흘려보냈다.

검시실 한쪽 구석에 자리한 노란 유리장에는 부검된 시신의 일부나 낙태된 태아 시신 일부를 병에 밤아 진열하는데 사용됐다. 얼마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을 통해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시청자에게 큰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 검시실 외관(상), 검시실 안 영안실(하)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해부실 내부에 작은 노란 문을 지나면 부검 전 시신을 보관하던 영안실로 통한다. 이곳에서는 시신 보관뿐만 아니라 단종 수술이 행해지던 처참한 현장이기도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울려 퍼졌을 수많은 젊은이들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맴도는 듯해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 강선봉 할아버지(좌), 장인심 할머니(우)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한센의 살아있는 역사, ‘소록도 어르신’을 만나다

이곳에 사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만큼 한센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해 이곳에 살고 계신 강선봉 할아버지(78)와 장인심 할머니(80), 이남철 장로(67)를 만나 보았다. (이남철 장로와의 대화는 추후 인터뷰를 통해 좀더 자세히 전하고자 한다)

강씨 할아버지는 1946년 8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경상남도 진주를 떠나 이곳 소록도에 강제 연행됐다. 할아버지 기억 속 소록의 첫 이미지는 죄수들을 가둬두는 형무소만도 못했다. 3m x 4m 짜리 좁은 방 한 칸에서 5~7명이 부대끼며 생활했기 때문에 허리 한번 제대로 펴기 어려웠다. 또 지급되는 식사는 한 사람당 밥 한 숟가락이 채 되지 않을 만큼 부족해 도저히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외부와의 차단은 물론이고 소록도 안에서조차도 마음대로 생활할 수 없으니 경제활동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주는 대로만 먹고 주는 대로만 썼다. 설령 도망가더라도 녹동 물살에 휩쓸려 장흥이나 금산 바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기 일쑤였고, 도망에 성공하더라도 다시 잡혀오기 십상이었다. 도주죄가 가장 큰 죄로 여겨지는 소록도에 다시 잡혀들어올 경우 감금실에서 한 달가량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장 할머니는 소록도에서 아주 가까운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막내딸로 공부도 곧잘 해 아버지에게 이쁨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10살 무렵 한센병이 발병했다. 장 할머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소록도에 가지 않고 집에 숨어 남몰래 치료를 받아왔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화병이 나 세상을 떠났고 그해 할머니는 30리나 되는 녹동항까지 어머니와 오빠의 손을 잡고 걸어왔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소록도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밤이 되면 물에 젖은 걸레는 마르기는커녕 땡땡 얼어붙고 양동이에 받아 놓은 물은 살얼음이 피었다. 한 방에 8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추위를 달래기 위해 옹기종기 붙어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또 계절도 없이 사시사철 늘 굶주려야 했다. 털다 남은 보리를 배급받아 방앗간에서 직접 정리해 끼니를 때웠다. 그마저도 귀해 쌀 한 줌에 물을 잔뜩 부어 죽을 쒀먹었다. 밖에 나가 돈을 벌 수 없었기 때문에 돈벌이는 못하고 고구마, 각종 채소 등을 직접 경작하며 식량 벌이 정도만 했다.

강씨 할아버지와 장씨 할머니에게 그 어떤 것보다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자신을 똑 닮은 자식을 손에 안아보지 못한 것이다. 두 분 모두 단종·낙태 수술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 강선봉 할아버지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강씨 할아버지는 단종·낙태 수술 이야기가 나오자 극도로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단종 수술을 해야 동거를 할 수 있고 임신되면 낙태시켜버리고. 한 번 생각을 해봐 우리나라 헌법 몇 조 몇 항에 그런 얘기가 있는지. 왜 법에도 없는 짓을 우리한테 하고 정부는 이제 와서 아무 잘못이 없다 해요. 이게 맞는 소린가요. 내가 이 얘기만 하면 화가 나. 21살에 단종 당하고 평생 이렇게 자식 하나 없이 사는데 원망이 안되겠어요. 정부한테 우리가 바라는 건 딱 하나에요. 천국에서 먼저 간 한센인 선배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다 해결하고 왔으니 마음 편히 쉬십쇼’라고 한 마디 할 수 있게 잘못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가슴에 엉킨 응어리라도 풀어주라 이거에요.”

울분을 토하는 할아버지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건 아닌가’라는 마음의 짐 때문인지 기자 역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 장인심 할머니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장씨 할머니는 말로는 괜찮다곤 했지만 아이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우리 아저씨는 맨날 천날 ‘자식도 없는데 뭐 하러 일하냐’며 돈도 안 벌고 한탄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활력도 없는데 자식 없길 잘했지 뭐’라고 면박 줬지. 나도 젊어서는 힘들긴 했는데 괜찮았어요. 나는 젊은 사람들하고 아이들을 굉장히 사랑해. 그래서 매일 기도해요. 전쟁 안 하게 해달라고.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오늘도 5시에 기도하러 가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하는 할머니 모습에 기자도 웃음으로 답했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은 더욱 애잔해졌다.

요즘 소록도 앞바다에 하루가 멀다 하고 곡소리가 흐른다. 주민의 대다수가 이제 하늘나라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는 고령의 노인이기 때문이다. 장씨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이날도 한차례 입관식이 예정돼 있었다. 기자가 만난 소록도는 여전히 설움과 한으로 가득한데 이를 풀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이 점점 늘어만 가는 게 야속할 따름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소록도의 저녁은 여전히 고요하고 한적했다. 마냥 좋기만 했던 이 평화로움이 애써 뼈아픈 역사를 잊으려는 몸부림은 아닐까라는 씁쓸함을 안고 소록도를 떠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