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난 다음 날이었던 10일 토요일, 나는 낮 12시가 다 돼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전날 밤에 어머니께서 급체를 하셔서 챙겨드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새벽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 뒤에 거실로 나가보니 전날 밤 어머니의 병세와 당장 나의 피곤함이 밤새도록 어우러진 탓인지 집안 가득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광화문에 나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한 번 끊어진 긴장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마련이었다. 다음 주에 나가기 위해서라도 오늘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타인에게 나의 사회적 관심사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두 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내’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역시나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타인’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혹여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에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나의 말이 아닌 ‘행동’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내가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광화문에 나가는 것은 누가 내게 참여를 호소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무관심과 게으름을 비난했기 때문도 아니다. 누군가 그곳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갈 수 있었다. 모이자는 말 이전에 촛불을 들고 있던 존재가 이미 거기에 있었다.

자발적이면서도 거대한 사회적 흐름에는 언제나 공통된 특징이 있다.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 가겠다, 가고 싶다,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많아도, ‘너’도 있어야 한다, 왜 거기에 없느냐는 비난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수없이 많은 ‘나’라는 존재가 그동안 끊어져 있던 또 다른 ‘너’와의 고리를 불러낸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불러낸 것은 광장의 촛불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숨죽여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촛불 덕분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권력자들과 그 주변의 부역자들 사이에서 살아 숨 쉬고 있되 마치 눈과 귀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치부되던 건물의 관리자, 조리사, 운전기사 등 평범한 사람들이 증언을 한다. 아주 오래도록 금기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기자들 역시 앞 다퉈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광장에 서 있던 우리가 호출해낸 것은 영웅이 아니었다. 정의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만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휴일이면 쉬고 싶고,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뉴스는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리곤 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광장에 나오는 것이다. 이제야 진실을 털어놓는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들을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지만, 그 사람들 역시도 광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다. 소신과 절차대로 일을 처리했을 때 그 결과가 불이익으로 돌아온다면 흔들리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은 결국 초인이 아닌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전제로 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여러 모로 피곤한 제도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좋은 정치와 안락한 삶을 거저 주지 않는다. 나의 선택과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지도 뚜렷하지가 않다. 다만 가끔 이렇게 촛불정국처럼 예외적인 상황에서 그 인과관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똑같은 국회의원들인데도 불과 몇 개월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고,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물며 얻을 것은 조직의 배신자라는 낙인이요, 잃은 것은 밥줄 뿐인 상황에서 언론의 주목도, 정당조직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나는 그날 오후 몸을 추스른 뒤에 광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나갈 것이다. 거창한 목적과 비장한 결의를 안고 집을 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저 광장에 수많은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존재가 나의 참여를 불러들였듯이, 수백만 분의 일에 불과한 나의 촛불이 살아가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발언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준다고 믿고 싶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