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동네에 있는 한 초등학교 앞에는 도로가 있다. 가끔 차를 몰고 지나간다. 그 학교 정문 근처에는 속도표시기가 있다. LED 전광판에 '당신의 현재 속도'라고 써 있는데 다가오는 자동차의 속도가 자동으로 뜬다. 차가 시속 30km를 넘으면 전광판 맨 위에 붉은색의 찡그린 얼굴이 빛났다가, 그 이하면 초록색의 웃는 얼굴로 바뀐다.
 
생각없이 운전하다가도 그걸 보고서 속도를 조절하곤 한다. 운전자와 어린이 그리고 학부모 중 누구도 교통사고를 원하지 않는다. 이 장치는 도로를 건너는 학생들의 안전도 지키지만, 동시에 운전자가 불의의 가해자가 되는 걸 막아준다.

스쿨 존(school zone), 즉 어린이 보호구역은 도로교통법으로 정해져 있다. 어린이 시설의 주 출입문 주변 300m 이내에선 자동차의 통행속도를 시속 30km 미만으로 제한 할 수 있다.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 신호기와 안전표지 등의 도로부속물을 설치해야 한다. 위의 속도표시기가 그런 부속물이다.
 
어린이 보호구역은 빨리 가려는 운전자의 마음과, 대응이 미숙한 어린이의 생명이 맞닥뜨리는 갈등을 조정한다. 갈등의 핵심은 교통사고를 우려하는 모두의 '불안'이지만, 각자의 불안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공간과 행위를 설정함으로써 불안의 범위를 정하고, 속도표시기를 설치함으로써 불안의 경계를 시각화 했다. 이해당사자간의 사회적 합의는 이렇게 현실에서 체감 가능한 약속이 된다.
 
여기엔 필시 여러 분야의 연구 성과들이 집약됐을 것이다. 어린이의 심리적/신체적 발달정도, 운전자의 심리와 반응능력, 이동중인 차량의 물리법칙 등을 고려했을 것이다. 즉 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분야의 지적 수준의 총합은 그 사회가 불안과 갈등을 해결하는 수준이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학문적 성취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논의의 장 또한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거나 혹은 약속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논의의 방식과 문화를 돌아 볼만 하다.
 
어린이 보호구역이 공간과 행위에 대한 약속을 규정한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의 논의 문화에는 대립하는 주장들을 어떤 방식으로 교환할 지를 정한 건강한 약속이 없다. 한국 사회에선 그 대신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심정적 쏠림'이 논쟁의 중앙에 위치한다. 틀 자체가 이렇다 보니 각론으로 들어가도 그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전에 있었던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과거 성관념 논란이 대표적 사례다. 이 사안의 성격은 성담론에 속하는 동시에 정치권에 끼치는 영향 때문에 정치담론에도 속한다. 성담론과 정치담론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인권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그의 직무유지를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민주주의에 거는 각자의 기대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하지만 소란의 와중에 이 불안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불안이 감춰진 자리에는 개인의 내면을 쟁점화하는 여론이 들어섰다.
 
탁 행정관의 현재 입장이나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의 진정성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그의 내면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상을 온전히 확인 할 방법은 없다.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고 옹호하든, 과거의 성관념을 오늘에 소급하여 비난하든 양측 모두 근거가 빈약하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개인의 내면을 규정하려는 것은 심정적 쏠림을 확신하기 편리하므로 시도된다. 그 결과 성담론과 정치담론을 둘러싼 시대의 약속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논란은 개인화 됐다.
 
이런 특징은 우리사회의 여러 갈등에서 지속적으로 반복 된다. 사드배치,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정책, 탈원전 정책 등 거의 모든 사회적 찬반 논란의 장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는 것은 이해당사자간의 감정이다. 외교에 대한 불안, 가난에 대한 불안, 낙오에 대한 불안, 생명에 대한 불안은 파편화 된 개인들이 벌이는 갈등의 차원에서 머문다. 평소에 300m 이내 시속 30km이하라는 제한을 논하지 않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부랴부랴 감정이 격화된다.
  
만약 우리에게 여성의 권리나 성평등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있었다면, 성담론이 정치담론과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론이 명확했을 것이다. 청와대 행정관의 위치는 성담론의 경계선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의 고루한 성의식은 정치담론의 경계선 안쪽인지 바깥쪽인지를 아직 합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더 나은 세상에 거는 기대의 결과만을 의식할 뿐 과정을 소홀히 한 결과다.
 
갈등의 과정에서 불안을 정면으로 다루는 방식에 대한 약속이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뿐 아니라 합의를 위한 논의의 방식조차 범위와 경계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없다. 그 것 자체가 불안이다. 우리사회의 불안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불안의 경계를 향해 달리는 현재속도는 웃는 얼굴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