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그것은 연출이 아니라 폭력이다’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기자회견

▲ (왼쪽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위은진 위원장,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김미순 상임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백재호 운영위원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폭력’을 ‘연출’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캐스팅됐다가 감독이 폭행과 시나리오에 없는 연기를 강요해 하차한 여배우 A씨의 피해에 여성계와 영화계, 법조계 136개 단체와 12명의 공동변호인단이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꾸려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8일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에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A씨의 변호를 맡은 서혜진 변호사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 한국여성민우회 김민문경 상임대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안병호 위원장, 여성영화인 모임 채윤희 대표, 찍는페미 박재승 대표,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이명숙 대표,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경 교수 등이 참석했다.

“대본에도 없는 성적행동 지시·폭행”
일방적 출연 포기 주장 사실과 달라

서 변호사는 사건 경과보고를 통해 “지난 2013년 3월 2일 A씨가 김 감독으로부터 영화 ‘뫼비우스’의 시나리오를 수령하고 ‘엄마’ 역할로 캐스팅이 확정됐으며 3월 9일부터 이틀간 A씨 전체 출연분량의 70%를 촬영했다. 이 과정에서 김 감독이 폭행과 시나리오에 없는 연기를 강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감독에게 당한 폭행·강요 등을 이유로 김기덕필름 측과 수차례 상의 후 같은 달 13일 하차를 결정했다”며 ‘A씨가 일방적으로 출연을 포기하고 연락을 끊었다’는 김 감독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 김기덕 사건 경과 일지 ⓒ투데이신문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참가자 발언에서 “이 사건은 감독과 배우라는 전형적인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며 “김 감독이 대본에도 없는 성적행동을 지시·폭행하고 모욕을 주며 명예를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발언한 한국여성민우회 김민문정 상임대표는 “2009년 고(故) 장자연씨 사건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연예계의 뿌리깊은 문제”라고 이 사건을 정의했다. 또 “민우회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를 통해 상담한 내용 중에는 여배우들이 겪고 있는 감독에 의한 성폭행을 비롯해 여성연예인지망생들이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현실이 있다”며 “‘원래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현장에서 시나리오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등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으로 피해자가 나서기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4년 전 일을 왜 이제야 들춰내느냐는 물음에 김민 대표는 “A씨는 지난 4년간 일관되게 피해사실을 알렸고 김 감독의 처벌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면서 “A씨에 대한 비난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혜진 변호사,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 한국여성민우회 김민문정 상임대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안병호 위원장 ⓒ투데이신문

“조사과정서 스태프 증언 있으면 사과한다고 해”
김기덕 감독, 폭행 사건 외면하려는 의도 있어

공동변호인단에 참여한 변호사인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이명숙 대표는 “A씨가 상담을 받을 당시 어떤 변호사는 고소를 말리기도 했고 여러 여성 단체들도 2차 피해를 우려하는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돈 때문에 소송했다는 오해를 피하려 A씨는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고 있다. 김 감독이 사과한다고 했는데 이 사건은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기덕필름 측과 상의해 하차를 결정한 것인데 (김 감독이 밝힌 입장문에서) A씨가 무단이탈했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전국영화산업노조 안병호 위원장도 “폭행 사실이 있으면 그냥 사과하면 될 일인데 영화인신문고 조사과정에서 (김 감독이) ‘스태프가 증언하면 사과하겠다’고 했다”며 “사건을 외면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현재 여성영화인모임과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면서 “이제야 실태조사에 들어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발언한 찍는페미 박재승 대표는 “영화가 작품으로서 하나의 예술로 평가되려면 제작에 참여한 모두가 자신이 만드는 영화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며 “누군가가 영화 제작에서 배제되고 심지어 폭력을 당하면서 만들어진 영화가 스크린에 띄워진다는 것은 아주 부끄러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의를 위해서 수많은 여성배우와 여성영화인들이 당한 성폭력을 감춰왔고 많은 동료들을 잃어야 했다”며 “현장 내 수많은 문제들이 권위적인 제작자들의 폭력 아래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는 “여성영화인을 주축으로 ‘범영화인성평등대책기구’를 구상 중”이라며 “오는 8월 말까지 실태조사를 마치고 토론회를 통해 기구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채 대표는 “여성 뿐 아니라 언제 어떤 현장에서든 폭력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피해자가 이미 오래 전 발생한 일을 발고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라며 “신고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논쟁은 그야말로 사건의 본질과는 별 관계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 찍는페미 박재승 대표,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이명숙 대표,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 ⓒ투데이신문

”영화 촬영 현장을 비열하게 이용한 사건”
 영화계 인권침해 문제, 끝없이 반복되고 있어

대책위는 이어 낭독된 기자회견문에서 “배우의 감정이입을 위해 실제로 폭행을 저지르는 것은 ‘연출’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면서 “이는 연출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했다. 또 ”이 사건은 감독이라는 우월적 지위와 자신이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영화 촬영 현장을 비열하게 이용한 사건”이라며 “피해자의 이름만 바뀔 뿐 끝도 없이 반복된 영화업계의 폭력적인 노동환경 등 뿌리 깊은 인권침해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주목하며 영화계, 나아가 연예계 전반에 만연한 인권침해의 문제를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공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기자회견을 마치며 ▲피고소인이 자행한 폭행과 강요죄 등에 대한 서울중앙지검의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 진행 ▲‘연출’이라는 명목으로 출연 배우들에게 자행되는 폭력, 강요 등의 문제해결을 위한 영화계 내 자정노력 ▲정부의 영화계 내 인권침해 처우개선을 위한 정기적 실태조사 실시 및 관련 예산 적극 마련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 피해 여성배우 신상 파헤치기 중단 등을 촉구하는 4대 요구사안을 발표했다.

한편 대책위는 8일부터 오는 9월 7일까지 한 달간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 성폭력 등 인권침해 신고를 받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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