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일을 하다 보면 상급자의 지시내용이 명확하지 않거나, 의뢰인으로부터의 요구사항이 모호한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면 결국 일을 이중삼중으로 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들은 시대가 변화해도 좀처럼 그 빈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갑이 을에게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일 문화가 갖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이지 싶어진다. 처음부터 지시사항이 명료했더라면 일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지시한 사람 역시 더 편했을 텐데 왜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일까.

일단 지시를 내리는 사람 본인부터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지시사항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아랫사람이 어떻게든 틀을 잡아 보고서를 제출하면 그제야 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까지는 별 말이 없다가, 받고 나서야 빨간 펜으로 줄을 죽죽 그으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상급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포병대대에서 교육장교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직속 상급자인 작전과장님이 몇 개월 정도 부재중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풋내기 소위가 만든 훈련계획 및 여타 보고서들이 대대장을 거쳐 곧바로 상급부대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당연히 몇 번의 자잘한 사고들이 일어났다. 그 후 대대장님께서 내게 신신당부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보고서 초안은 무조건 빨리 올려라. 내가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작성해도 당신 마음에는 들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말씀처럼 완벽을 기하기보다 적정한 수준의 보고서 초안을 최대한 빠르게 올렸고, 이후로는 기한을 어기는 사고가 없어졌다. 최종 보고서의 수준 역시 올라갔다.

그런데 이건 그래도 절차와 책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군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사회는 어느 조직을 살펴봐도 전반적으로 신상필벌이 제대로 이뤄지는 분위기가 아니다. 혹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책임을 묻고 처벌을 하는 기제는 상당히 가혹하게 작동한다. 특히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권한과 책임의 비대칭성이 강해진다. 중간 관리자들로서는 구체적으로 업무를 지시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만한 메리트가 별로 없다. 그러니 독박을 피할 수 있는 회피로를 본능적으로 마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더십만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경우 대개 팔로우십에도 문제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는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관련사항을 꼼꼼히 챙기는 상급자들을 대개 도량이 작고 예민하며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작은 일은 잘 하지만 큰일은 하지 못할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윗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억지로라도 통 큰 척을 해야 하고, 아랫사람에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선문답 식의 모호함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모든 일에는 구체적으로 지시를 해야 하는 부분과 과감하게 위임을 해야 하는 부분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런 훈련을 할 수 있는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동등한 관계일 때부터 역할에 따른 업무 분담, 요청과 이행, 책임과 보상 등을 연습하며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돌아보면 그런 경험을 한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클럽이나 대학의 같은 과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대개 아무런 준비 없이 곧바로 상하관계로 묶여버리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조직은 돌아가야 하는 것이니 문명화되지 못한 분야에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인 폭력적 위계질서가 작동방식으로 들어선다. 가끔씩 인터넷에서 폭로되는 괴이한 학내 규칙들은 이러한 폭력적 질서의 산물이며, 내부 구성원들이 외부의 비난을 방어하며 불합리한 규칙들을 적극 옹호하는 것 역시 다른 방식의 질서를 훈련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대학에 다녔을 때는 수업 조모임의 무임 승차자들을 다른 조원들이 어떻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교수에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팀워크가 나쁜 조로 낙인찍혀 가차 없이 학점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다들 무임승차를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윤리적, 사회적 협동기제가 자리 잡지 못한 현실에서 유일한 수단인 교수의 권위조차 빌리지 못하는 상황이 당시로서는 무척 답답했다.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고, 필기를 하고, 리포트를 내고,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교수의 리더십 덕분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학점이라는 평가수단이 강력한 인센티브이자 규제수단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 스물 남짓의 학생들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간다. “알아서 해봐”라며 권한 없는 의무만 던져주는 상급자나 의뢰인을 계속 만나게 될수록 이게 단순히 개인의 업무능력이나 인성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과 하, 갑과 을 사이에는 무언의 약속된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합의를 깨뜨리는 쪽은 그것이 호의로 인한 것이더라도,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더라도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모호한 지시사항을 던져준 상급자에게 세부적인 사항들을 꼬치꼬치 물어보다가 예상치 못하게 폭발하는 모습을 본 다음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는 나의 질문을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기 얼마 전까지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무척이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다른 상급자들보다 좀 더 마음과 몸이 고생을 해야 했다. 그의 변화가 과연 그만의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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