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지인의 지인, 그러니까 사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 여성 A는 아들 삼형제만 있는 집안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되었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아들만 셋을 키워왔던 시부모는 이 첫 번째 며느리를 그렇게나 예뻐했다. 마치 내 딸인 양 며느리를 대하겠다는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지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이 시부모는 상견례 자리에서 꺼냈을 그 말 그대로 잘 대해줬다고 한다. 당사자인 A가 지인들 앞에서 자기 본위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러했으니, 실제로도 분명 좋은 분들이셨을 테다. 그렇지만 A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와의 관계가 불편하다고 했다. 바로 대화 때문이었다.

그 집안의 아들 셋은 집에서 모두 말이 없었다. 그에 반해 시부모는 부모와 자식 간에 진솔하고 사근사근한 대화가 방이며 거실이며 깊게 배어있는 분위기를 늘 바래왔는데, 드디어 집안에 젊은 여성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꿈꿔왔던 것들을 모두 A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참아왔던 가족으로서의 대화가 폭발했다. A가 힘들어했던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고, 왜 자신이 힘든가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나는 우리 부모와도 대화를 잘 하지 않는데...

많은 시부모들이 꿈꾸고 다짐하는 ‘딸 같은 며느리 프로젝트’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핏줄의 유무를 거론한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은 결단코, 영원히 같은 높이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분석이 늘 어딘가 한 구석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A의 사연을 전해 들었을 때 그 한 구석이 채워졌다.

보통 딸 같은 며느리에서의 딸은 다음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에게는 애교를 잘 부리고, 어머니와는 시도 때도 없이 온갖 대화를 주고받으며 개인사와 관심사를 공유하며, 쇼핑할 때는 당연히 따라 나서고, 그 외에도 가정의 온갖 대소사에 상황에 따라 화사한 미소나 진심어린 슬픔을 곁들여 노동력을 제공하는 순종적이며 밝은 연하의 여성. 아들 같은 사위에서의 아들 역시 순종과 묵묵함과 듬직함을 겸비한 집안의 흔들리지 않는 기둥 같은 존재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 가정의 자식들은 정말 저러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가.

시부모의 진심어린 프로젝트가 늘 실패하는 이유의 방점은 며느리가 아닌 ‘딸’에 찍어야 했다. 애초부터 ‘딸 같은 며느리’에서의 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화된 존재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그렇기 때문에 딸 같은 며느리는 처음부터 좌절과 갈등이 내재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실제 진짜 자식들로부터는 채워질 수 없는 시부모의 욕망, 주변의 시선, 그리고 시대에 뒤쳐진 성적 차별까지, 성공하면 오히려 이상한 요소들이 어른과 아랫사람이라는 권력관계와 선의를 가진 표현 아래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씩 뜯어놓고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제가 딸처럼 생각하겠습니다”라는 명제는 어떻게 해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확장된 개념의 ‘정상가족’이라는 강요가 우리 사회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보통 ‘정상가족’이라고 한다면 아빠와 엄마, 자녀가 온전히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구조적인 측면을 이야기하지만, 좀 더 개념을 넓혀 각 구성원에게 주어진 관습적 역할까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는 구현되기 힘들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강고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상가족의 압박감이 권력관계에 따라 편의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바로 딸 같은 며느리가 아닐까. 요즘은 좀 덜해졌겠지만 며느리가 들어오면 없던 제사가 생기는 것도, 뜬금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합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한 편으로는 딸 같은 며느리와 아들 같은 사위를 기대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어떤 부모들의 모습이 서글퍼 보이기도 한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설사 채워진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연말이 다가오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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