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칼럼니스트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사람들의 분노는 경기장면으로부터 시작됐다.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팀추월 경기. 이 경기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세 선수들 사이의 협력이 마지막 두 바퀴에서 실종됐다.

마치 뒤로 처진 노선영 선수를 버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김보름 박지우 두 선수가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다.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먼저 통과한 두 선수들만의 인터뷰였는데, 그들의 인터뷰에선 올림픽을 함께 준비 해 온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동료의식이 도무지 엿보이지 않았다. 이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빙상연맹 내부의 파벌대결과 내홍, 그 결과로 빚어진 기이한 훈련 과정들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주 회자되어 빙상종목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이름들과 내용이었다. 논란은 급기야 하룻밤 사이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갔다. 올림픽이 끝나면 앞으로 이 문제는 새로운 길을 걸을 것 같다. 

눈여겨 보게 되는 것은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분노의 촉발과 전개 방식이다. 이 전개에는 한국사회, 한국인만의 특징이 보인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전세계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인류 보편적 통념과, 이에 더해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특정 집단으로서의 가치나 규범도 함께 포함된다.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권위와 위계의 폭력으로 비틀어진 사회, 그 사회를 지탱해 온 카르텔들에 대한 강렬한 저항은 지금 우리 모두의 최대 화두다. 사방엔 청산해야 할 구습의 잔재들이 널려 있고, 그 하나하나를 언제 다 꿰매고 개선 해 나갈 수 있는지 막막하기만 한 현실. 어느 한 군데 비정상적인 구조가 또아리를 틀지 않은 곳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촉각은 부조리의 발견에 집중하고 있다. 보다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염원과 그 염원이 구현된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한국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갈증이다. 한 사회의 갈증은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상식과 규범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우리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유명인들, 상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모종의 인격이 부여되길 원하는 방식으로 재소환된다. 공의롭고 정정당당한, 그리하여 이상향이 실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사람에게 입혀져 형상화된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운동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선수들의 어깨에 지워진 것은 성적에 대한 기대만이 아니다. 한국인이 스스로에게 이상적으로 바라는 한국인상, 현실에서 꼭 보고 싶어하는 어떤 표상으로서의 한국인. 그것을 선수들도 매체 앞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우리의 모습을 대리 체현 해 주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쥐어지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욕망이자, 스포츠만이라도 비릿한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있길 바라는 숨구멍을 향한 갈망이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스포츠 스타가 되려면 실력과 보통의 인성을 넘어 그 이상의 위대하고 우아한 인격까지 구비되어야 한다. 지덕체의 겸비가 이루어진 군자상은 이상적 유교국가를 꿈꿔 온 한국인의 오래된 숙원이다. 나는 비록 군자가 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를 대표하는 이는 그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대표된 이가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만방에 보이도록 현실화 시켜야 한다. 한국인의 우상(아이돌)에겐 이런 성분이 공통분모여야 한다. 

그래서 악행의 주체로 지목된 선수들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는 어떤 면에선 물거품이 된 이상향 또는 욕망의 좌절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좀 더 나은 나와 우리의 모습이 중계화면에 나오길 원했지만 그 희망을 꺾은 대상들에게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생각 해 볼 때,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 하면서 집단의 대표자들이 집단뿐 아니라 '나'도 동시에 대표해 주길 바라는 절묘한 국민국가적 현상이다. 그래서 파행적 경기운영을 한 것은 선수들이지만,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그걸 보는 이들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그러니까 자신들의 내면을 향하고 있다. 네가 혹은 너희가 왜 나를 망치는가. 

한국인이 갈망하는 정의로움과 공정함이라는 규범 추구의 강렬함 이면에는, 현실이 내내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매우 한국스러운, 한국인다운 현재가 담겨 있다.이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이상적 세계를 가로막는 무언가를 추월하고 싶어하는 의지이기도 하다. 마이클 센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동안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가 생산하는 정보에도 깃든다. 오늘날 각 개인이 하나의 미디어 채널 역할을 하는 현실에서, 소셜 네트워크의 모든 참가자들은 각자가 주시하는 방향대로 특정한 틀을 갖추고 정보를 발산한다. 동일한 선수의 인터뷰를 보아도 그 얼굴에서 누구는 난처한 웃음을 보고 누구는 일진의 비아냥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대개 얼굴표정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읽어내는 인간의 본능적인 기술은 어마어마 하지만, 정보 수집의 균형을 채 갖추기도 전에 각자의 강렬한 의지는 디지털 신호가 되어 빛의 속도로 전파된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양산된 콘텐츠들은 끊임없이 반복/재생/분화되면서 하나의 형상을 갖추고 당분간 실체를 대신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언젠가 책임 있는 기관이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나서서 관련자들을 모두 인터뷰하고 숙의하여 결론을 내려야만 현재 회자되는 내용들의 전모가 밝혀질 지 모르겠다. 책임 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질 날이 오려면 사안의 실체를 파헤치는 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전까지 당장의 여러 이야기들은 사안의 어느 한 단면 이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연맹과 코치진 그리고 선수들을 포함한 관련 당사자들 조차 각자 자신의 시야각에 들어온 현상만을 해석해 낼 뿐이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경기중에 잘못한 선수들과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팀 내의 누군가 차별을 겪었다면 그 앞뒤의 타래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엮여져 하나의 맥락으로 발전하여 특정한 지점에서 사건으로 화한 건지 정확히 아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쉽지 않다. 

따라서 현재 벌어지는 수많은 추정과 의심이 훗날 사안의 실체와 꼭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이 갑작스러운 대중의 소요는 경기 후 인터뷰 중에 갑작스레 터진 김보름 선수의 웃음과 닮은 점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가 담긴 인식에 의해 규정된 대상에 관한 판단을 믿느라 열심인데, 이는 자신의 경기와 상황인식에 자신 있었기에 스스로의 언행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김 선수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본질이 무엇이냐 보다 우리의 의지가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더 중히 여기는 것이 관성이 됐을 때 벌어지는 일.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추월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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