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친한 동생과 저녁을 먹으러 한강에서 가까운 단골 식당에 갔다. 돈가스를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차나 한잔 할 겸 한강 공원으로 갔다. 

아직 해가 뉘엿거릴 뿐 지지 않았기에 강가 풍경이 꽤나 좋았다. 배를 대기 위해 만들어 둔 너른 콘크리트 경사로가 탁 트여 있었다. 가까이 가니 강을 구경하기 안성맞춤이어서 앳된 티를 막 벗어낸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석양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있는 그들의 장면이 너무나 낭만적이고 행복해 보여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특히 여자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풍에 날리는 머리칼 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는 편안한 치마를 입은 이들이 많았다. 그 치마는 품이 넉넉하고 퍼지는 긴 원피스였는데 대부분 연한 파스텔 톤 꽃무늬가 있었다. 어찌 보면 집에서 입는 원피스 잠옷 같기도 했다. 낮이 아직 피곤한 눈꺼풀을 내리기 전이라, 사방에 차분하게 감겨드는 은은한 색들은 그들의 꽃무늬 치마를 평화로운 광경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 치마가 요즘 유행하는 모양인지 도심 길거리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시내에서 보았을 땐 그렇게 까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첫 인상은 오히려 정 반대였다.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다. 왜 저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초록 산등성이를 달릴 때나 입을 거 같은 옷을 입고 있을까. 이 바쁘고, 복잡하고, 냉정하고, 구석구석 더러운 도시 한 복판에서. 

어떤 옷들은 자신을 특별한 인물인양 느끼도록 하는 힘이 있다. 여자아이가 핑크색 공주 옷을 입고 인형에게 마법을 건다거나, 남자아이가 스파이더맨 옷을 뒤집어 쓰고 소파에서 뛰어내리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어른이 되고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끔 상상 속의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 동력이 될 만한 옷을 입고 감정을 충전한다. 깔끔한 정장과 힙합 스타일 옷과 주말 클럽 복장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어떤 표상을 그려내는 행위다. 그리고 그런 염원과 현실의 거리가 멀수록 옷도 현실적이지 않게 된다. 그러하므로 나는 궁벽한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건물들 사이에서 마주친 여자들의 꽃무늬 치마를 현실에 대한 애잔한 저항처럼 느꼈다. 그것은 마치 현실에 머무르지 못하고 유리 된, 그리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질없는 몸짓의 무늬 같았다.

하지만 그날 해질녘 꽃무늬 치마는 한강변의 산들바람 속에 더없이 완벽한 세상을 그려냈다. 그 광경을 보는 누구라도 같았을 것이다. 아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꽃무늬 치마는 한 몸처럼 어울리는구나. 그리곤 불현듯 알게 됐다. 저 꽃무늬 치마가 도심에서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 도시의 얼굴이 저들의 옷과 어울리지 않았던 거였구나.

인간은 불과 백년 전 까지만 해도 대부분 자연 속에서 살았다. 요즘처럼 거대도시에 몰려 살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규칙들로 이루어진 온갖 아름다운 무늬와 곡선과 색상들 속에 묻혀 살았다. 그리고 그건 뼛속 깊이 기록된 갈증이어서 현대를 사는 모두에게 여전히 충전되어야 한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만약 시가지가 자연을 닮아 아름다웠더라면 저들의 꽃무늬 치마는 아주 잘 어울렸을 것이다. 지극히 무신경한 남자였던 나는, 자연을 불러내는 목소리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꽃무늬 치마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옷을 도시 한 가운데서 입은 여자들의 끈질긴 회유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간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전에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자동차 시장이 처음 열리면 주된 고객이 중년 남자들이라 크고 튼튼한 무채색의 자동차들만 출시된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가 무르익어 여자들의 자동차 수요가 늘어나면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춘 다양한 색과 디자인의 차가 늘어난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위한 차들이 새 시장을 연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우리나라 자동차 종류의 변천을 보면 이는 맞는 말 같다.

그 기사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여자들의 요구에 맞춰 자동차를 생산하면 남자들도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남자들도 다양한 디자인과 편리함을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 여자들에게 이로운 것은 남자들에게도 이롭다. 그래서 한강의 꽃무늬 치마들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저들이 원하는 거리가 여름철 새벽빛을 받은 은빛 거미줄 마냥 도처에 심겨져 있는 도시였으면 좋겠다고. 기쁘고 행복한 거리가 되겠구나. 그네들의 바람처럼 낭만이 담긴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게 된다면 나의 행복지수도 올라갈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나지막이 읊조린 그 바람은, 마치 현실이라는 도시에 사는 우리의 씁쓸한 저항 같아서 우울한 무늬만 남긴 채 점점 사라져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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