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성우, 방송 MC, 수필가▷저서 안소연의 MC 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 되는 법><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아들아이가 킥보드를 타다 넘어져 양쪽 팔에 깁스를 했다. 그러고 나니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덩달아 나까지 참 힘들어졌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대소변 누이고 책보 싸고 풀고...

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들과 찰싹 달라붙어 지낸 덕분에 아들아이가 친구 문제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육아지식 중 아이들 고민에는 엄마 아빠의 구체적인 과거사를 들려주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던 것이 떠올라 까마득한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6학년 봄, 나는 나와 잘 지내던 J가 갑자기 나를 피해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한두 달 후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소풍날 점심시간 내가 앉을 자리를 의도적으로 없애버리고 학교 끝나면 뭐하냐는 질문에 늘 바쁘다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댔던 일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집단 왕따를 당하는 것에 댈 바는 아니겠으나 잘 지내던 관계의 사람이 갑자기 나를 피하는 경험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다.

세월이 흘러 내 절친으로 남은 J에게 ‘그 때 왜 그랬느냐’고 꼭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만나면 산적한 현안으로 수다 떨기 바빠 묻지 못했고... 그러다 결국 영영 이유를 알 수 없게 되었다.

J가 10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J입장에서도 이 세상 떠나기 전에 내게 똑같은 걸 묻고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J를 의도적으로 피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의 나는 J에게 늘 바쁜 친구였다. 싫은 사람 피하는데 그보다 나은 핑계는 없다.

미안해. 바빠, 할 일이 있어.

당시에는 잘 지내오던 친구를 피하게 된 나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 내기 위해 온갖 핑계를 갖다 붙였었다.

J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J는 이기적이야. J는 너무 무례해....

J는 원래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그걸 모르고 20년을 친구로 지냈던가? 아니다.

이기적인 건 모든 사람이 그렇다. 친구나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누구나 실수를 한다.

무례함도... J의 매력이었다. 그 애는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니까.

그렇게 다 알고 잘 지내왔던 것들을, 마치 절대 못 참을 걸 감내해온 오랜 희생자인양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나는 그 애를 피했었다.

왜 그랬을까?

한 두 달도 아니고 몇 년씩...

그건 시샘 때문이었다.

내가 J를 피했던 건, 3년쯤 방송을 떠났다 복귀했을 때였다. 이런 저런 외유 끝에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 J와 나는 완전히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빌빌대며 다시 일할 자리를 찾고 있는 한물간 라디오 진행자였고 J는 별 볼일 없는 부서의 번역 작가에서 공중파 TV까지 진출한 꽤 이름 난 방송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J를 소개한 내가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내 속 좁음이 정말 부끄럽지만 아들을 위해 다 털 수밖에...)

J에게 내가 좀 덜 바쁜 사람이 된 것은 내가 그럭저럭 다시 자리를 잡은 후였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누구나 한번쯤, 잘 지내오던 사람이 나를 갑자기 피하는 황망한 가슴 아픔을 겪는다.

지금 혹시 그런 아픔 속에 있는 분이 계시다면 꼭 기억하시라.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물론 내게 잘못이, 단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친구, 연인이 된다. 그런데 잘 참아오던 내 어떤 점을 그 사람이 갑자기 진저리치게 됐다면 그건 그 사람 내면에 생긴 문제 때문이다. 그 사람 내면의 무언가가 상처 받고 지쳐서 나를, 내 안의 무엇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들아이에겐 이렇게 말해주려고 한다.

니가 속상한 건 이해해. 하지만 널 피하는 사람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

게다가 지금 너를 피하는 그 친구는 마음이 몹시 힘들거든.

언젠가 극복하고 돌아온다면 기쁘게 맞이하자, 그렇지 않다면 그냥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우리 모두는 특별하고 소중해.

내 특별함과 소중함을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인생은 참 짧고.

우린 응원이나 하자. 니가 좋아하는 그 친구가 마음속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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