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주치의제, 장애인 건강 포괄 관리 목표
올해 5월부터 시범사업 시행…실효성 논란
기본 편의 시설 부족·주치의 필요성 ‘의문’
장애 고려한 물리적 환경·비용 개선 우선돼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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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그동안 장애인 건강권은 ‘재활’ 중심으로 논의돼 왔다. 그러나 최근 장애인의 건강관리와 예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의료접근성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를 반영해 올해 5월부터 장애로 인한 만성질환 등 포괄적인 건강문제를 관리해주는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시행 전부터 수요자인 장애계와 공급자인 의료계 양측 모두 실효성에 대해 우려했다.

이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시범사업이 진행 중인 지자체의 등록 장애인 중 0.03%만 해당 제도를 이용하고 있으며,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참여 의사를 밝힌 의료진 중에서도 단 15%만이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범사업 실행 후 6개월이 흐른 지금,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는 결국 모두의 외면을 받으며 ‘유명무실’ 정책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애초 장애인 의료접근성 문제 해소를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실질적인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로서의 개편이나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장애인건강주치의제 리플릿 일부 캡처 ⓒ투데이신문
장애인건강주치의제 리플릿 일부 캡처 ⓒ투데이신문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란

#. 뇌성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A씨는 B형간염 보균자다. A씨는 병원을 이용할 때 진료실까지 들어가는 과정이 제일 걱정스럽다. A씨의 거주지 인근 병원들은 대부분 2층이나 3층에 있고, 대부분 작은 건물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장애인용 리프트 장치도 없다. 결국 멀리 있어도 그런 시설이 있는 병·의원을 힘겹게 찾아갈 수밖에 없다. 진료에 성공하더라도 대화가 어려워 의사는 대충 알아들은 말로 간단하게 진찰을 마친 후 약을 처방한다. 본인이 가장 우려스러운 간염이나 다른 건강문제에 대해서는 진료할 기회가 없었다.

#. 시각장애인 B씨는 간호사들이나 의사가 시각장애에 대해 잘 모르는 점이 매우 아쉽다. 친절하게 안내하려는 마음은 좋지만 하얀 지팡이를 든 팔을 잡고 이끌거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건강안내서나 자료가 별도로 만들어진 곳이 없다. 의사에게 듣는 몇 마디 말보다 안내문을 통해 자신의 만성질환을 아는 것이 더 도움 되지만 자료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장애인 중 만성질환이 있는 비율은 83.2%로 앞서 실시된 2014년 조사(78.6%)보다는 4.6%p 증가했다.

장애인이 최근 1년간 병의원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한 원인으로는 경제적 이유가 39.3%로 가장 높게 나타났지만 ‘교통이 불편해서’ 25.2%,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7.4%, ‘의사소통의 어려움’ 2.5%, ‘병의원 편의시설 부족’ 1.2% 등 의료서비스 이용의 물리적 접근성과 인적 지원의 부족도 크게 작용했다.

장애인이 국가와 사회에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은 소득보장 41.0%, 의료보장 27.6, 고용보장 9.2% 등 순으로 의료보장이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특히 장애인 건강관리(장애 예방 포함)가 앞선 조사 때 1.2%에서 6.0%로 비교적 큰 폭으로 증가했다.

정부는 장애인의 건강관리과 의료보장에 대한 장애인의 욕구를 반영해 장애인이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도입을 추진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란 중증 장애인이 자신의 건강주치의를 직접 선택하고, 해당 주치의로부터 만성질환이나 장애 등 건강문제 전반에 대해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 제도다.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장애인건강권법 제16조에 따라 올해 5월 30일부터 시범사업으로 이뤄지고 있다.

1~3등급의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거주지 인근의 병원에서 고혈압과 당뇨 등 만성질환 또는 모든 장애를 위한 ‘일반건강관리’, 지체장애·뇌병변장애·시각장애 등 전문관리를 위한 ‘주장애관리’, 동네의원에서 일반건강관리와 주장애관리를 모두 합친 ‘통합관리’ 등 장애유형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범사업에 참여한 병·의원을 방문해 서비스를 신청하면 건강상태 포괄평가를 바탕으로 연단위 관리계획이 수립된다. 이후 맞춤형 교육과 상담을 실행하고 필요에 따라 전화 상담이나 방문진료, 간호 서비스도 제공된다. 합병증 등이 발생할 경우 다른 의료기관과 연계도 가능하다.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를 이용할 때 본인부담금은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을 경우 포괄평가 및 계획 수립 1회 교육·상담 최대 12회 기준 연간 2만1300원~2만5580원으로 비교적 저렴하다. 건강보험 차상위나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경우에는 무료다.

<자료 제공 = 국민건강보험공단 제공, 김상희의원실 재구성>

수요자도, 공급자도 턱없이 부족

정부는 장애로 인한 건강문제와 만성질환 등에 대해 기존에는 없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미충족 의료수요를 충족시키겠다고 당차게 나섰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의 실효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 보건복지부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실에 따르면 복지부는 지난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의료인을 상대로 장애인건강주치의 교육과정을 실시했다.

교육을 이수한 의사 312명 가운데 268명(86%)이 주치의 활동을 하겠다고 등록했으나, 48명(15%)만 실제 활동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의사 1명당 장애인 진료인원은 ▲‘1명’ 23명 ▲‘2명 이상 5명 이하’ 12명 ▲‘6명 이상 10명 이하’ 3명 ▲‘11명 이상 1명 이하’ 4명 ▲‘16명 이상 20명 이하’ 2명 ▲‘21명 이상 30명 미만’ 3명 ▲‘30명 초과’ 1명으로 절반 이상이 단 한명의 장애인만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범사업을 운영 중인 의료기관이 있는 지자체의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이용률도 높지 않다. 시범사업 참여 의료기관은 전국에 177개로, 해당 지자체 등록 장애인은 총 102만명이지만 이 중 302명(0.03%)만이 장애인주치의를 방문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참여율이 저조한 원인으로 ‘편의시설이 부족해서’라는 지적이 많다.

장애인이 의료기관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편의시설이 갖춰져야 하지만 시범사업 중인 의료기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편의시설 미설치율이 최대 92%에 달했다.

세부별로는 ‘대기실 영상모니터 미설치’가 91.5%로 가장 높았으며 ‘대기실 청각장치 안내’ 92%, ‘장애인용 세면대’ 48.3%, ‘장애인용 소변기’ 46.0%,  ‘휠체어리프트 또는 경사로’ 47.2%, ‘장애인용 승강기’ 42.6%, ‘장애인용 대변기’ 41.5%, ‘장애인 주차구역’ 38.6%, ‘주출입구 자동문’ 37.5%, ‘주출입구 높이 차이 제거’ 33% 순으로 조사됐다.

김상희 의원은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시범사업이 장애인의 건강관리 예방과 더불어 ‘일차의료 강화’ 등 의료체계 개편의 의미가 있다”며 “이 같은 의미에서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의 안정적인 정착이 매우 중요한데 의료진에게 신청을 받고 일방적으로 주치의를 선정, 이를 장애인이 알아서 찾아오라는 공급자 중심의 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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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 중심 의료 인프라 개선 필요”

수요자도 공급자도 적은 실효성 제로의 의료서비스 제공보다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실질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장애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이문희 사무차장은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의사도 적고 이를 이용하겠다는 장애인도 적은 상황이다.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 해당 제도에 대한 이해가 적은 상태”라며 “이대로는 유명무실하게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장애인이 병원을 잘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용과 비용 문제인데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는 이를 하나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며 “해당 제도에 대해 당사자들에 널리 알려야 하는데 홍보도 안 되고 예산도 없는 실정이다”라고 꼬집었다.

이 차장은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장애인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편의시설 확대가 필요하다. 그동안은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시행 의료기관 확대를 위해 마구잡이로 신청을 받았다면 이제는 의료기관이 있는 건물뿐 아니라 진료실 내부까지도 편의시설을 갖춘 곳으로 자격요건을 설정하고 철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의료기관까지의 이동권을 제공해야 한다. 장애인 콜택시로는 병원을 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현재 중앙장애인보건의료센터 측에 지역별로 의료기관 이용을 위한 콜택시 제도를 운용해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지역사회에서는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에 대한 홍보가 매우 부족하다. 해당 제도를 이용했을 때 당사자들에게 어떤 점이 이로운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며 “정부에서도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시행을 위한 예산 책정 등 행정적 지원을 확대해야 하는데 현 정권에서는 커뮤니티 케어의 일환으로만 생각해 이 문제가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차장은 “우리나라 장애인 건강상태는 사망 평균 연령이 비장애인에 비해 8년 정도 빠를 정도로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비장애인 중심의 의료 인프라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상용 사무국장도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도입 과정에서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많이 제기됐다. 중증장애인의 경우 병원을 이용할만한 환경이나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데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는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기존에 병원을 이용해오던 환자들도 ‘지금보다 나아지는 게 뭐지’라는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며 “장애인 진료가 가능하도록 병원의 물리적 환경과 비용문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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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장애인 건강주치의제 도입 고려해야”

일각에서는 현재 양방 의료계로 국한돼 있는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를 한방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한한의사협회(이하 한의협)는 “장애인 건강주치의제에 대한 한의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의지와 더불어 장애인의 한의약 치료에 대한 높은 만족도가 충분하게 확인됐다”며 “그럼에도 보건복지부는 양방의료계의 저조한 참여로 힘들어하면서도 양방 의사만이 참여하는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을 밀어붙였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의협 한의학정책연구원이 회원 169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장애인 대상 한의사 주치의제 참여 의사’ 질문에 대해 94.7%가 ‘참여 의사가 있다’고 응답했다.

한의협은 “장애인의 건강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다양한 한의의료서비스를 배제한 것은 국가 차원에서도 큰 손실”이라며 “장애인의 진료선택권과 의료접근성 보장을 위해 한의사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는 빠른 시일 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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