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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페스트(2018)’ ⓒ뉴시스

“사람이 숨을 쉬고 있을 때는 모른다. 그 사소한 숨쉬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상이란 단어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가.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금지선이 그어진 것만 같았다. 저마다의 시간과 공간을 달리던 사람들은 일상이라 여겼던 곳에 멈춰선 채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언젠가 분명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예견했던 것일까. 그래도 불과 몇 달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연극 ‘페스트’에 나타난 이야기는 지금 우리 삶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2018년에 상연됐던 연극 ‘페스트’가 지난 4월 6일과 13일 국립극단 유튜브 온라인 상영회를 통해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4월 19일까지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이 지속 되면서 국공립 극장의 무료 온라인 공연 스트리밍 서비스가 이어졌는데, 올해로 창단 7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의 연극 ‘페스트’ 역시 그중 하나였다. 조심스러운 시기에 공연장으로 선뜻 발을 옮기기 어려웠던 관객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새로이 선보였던 연극 ‘페스트(박근형 각색·연출)’는 당시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의 ‘2018 세계고전 시리즈’ 중 하나로 공연됐던 작품이다.

연극의 바탕이 된 고전소설 ‘페스트’는 알제리의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갑작스럽게 퍼져버린 전염병 페스트와 끝까지 싸워 이겨낸 시민들의 이야기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갈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담겨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지만, 혼란으로 뒤덮인 상황의 세밀한 묘사와 소시민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위기 극복 등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 뚜렷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코로나19(COVID-19)의 세계적 확산에 다시금 눈길을 끌었던 소설 ‘페스트’는 2016년 국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음악을 활용한 주크박스 뮤지컬로도 먼저 제작된 바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재상연된 연극 ‘페스트’는 각색을 거쳐 원작과 달리 하나의 섬을 배경으로 한다. 장벽에 가로막혀 동서로 갈라진 섬은 마치 분단국가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주인공인 의사 베르나르 리유 역에는 경기도립극단 수석단원인 이찬우와 국립극단 시즌단원 임준식이 열연했고,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 역 박형준의 반가운 얼굴도 보였다.

첫 장면에선 철제 장벽으로 가로막힌 벽을 두드리며 뭔가를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곧이어 장벽이 걷히고 한 중년 남자가 무대 위로 등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손에 들린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파란 외투 간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그는 미래의 베르나르 리유로, 연극의 서술자다. 작품에서는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관객들이 그가 겪었던 시기를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마치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려는 듯 거세게 부는 바람 소리는 섬이라는 공간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여기에 차디찬 회색으로 가득한 무대엔 성냥갑 같은 창문으로 가득한 벽, 목재 계단을 가로질러 사선으로 길게 뻗은 경사로가 눈에 띈다. 극적인 상황에 맞게 각기 다른 빛으로 일렁이는 수조도 인상적이다.

리유는 병원으로 향하던 길에 우연히 계단에 죽어있던 쥐 한 마리를 발견한다. 어느새 쥐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더니 그 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마리로 급격히 불어나고 만다. 쉴 새 없이 자루에 담아 버려도 쥐는 끊임없이 발견됐다. 시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신문은 당국의 대처에 주목했다. 처음엔 쉽사리 전염병의 발병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곧 증가하던 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몸에는 정체 모를 검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바로 ‘페스트’였다.

‘페스트’란 공포 그 자체였다.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 늘자 감염병에 대한 공포심은 곧 저주로 바뀌어 버리고, 장벽 너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원한으로 변해간다. 당국은 예방적 조치를 취하고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려 하나 내부에서도 갈등은 이어진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자 결국 도지사는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도시를 폐쇄하게 되는데, 그 모습이 곧 ‘독 안에 든 쥐’를 연상케 한다. 그들의 섬은 고립된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도시를 떠나려 하고, 누군가는 삶을 포기하려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맞서 싸운다. 부정적인 상황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페스트를 인간에게 내리는 신의 벌이라 주장하는 누군가도 있다. 그런 가운데 리유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힘이 닿는 데까지 아픈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 것이라 다짐한다. 조제프 그랑과 장 타루, 레몽 랑베르도 그를 돕는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무대, 극적인 느낌을 더하는 피아노 선율은 죽음을 목도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마스크를 쓰고 방역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마주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다.

치열한 저항 끝에 페스트가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리유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만다. 처음엔 서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가 이후 끝까지 페스트와 맞서 싸운 기자 랑베르는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던 리유의 마지막 인사에 ‘우리’란 단어가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며 고마움을 전하고 섬을 떠난다. 이후 리유는 요양차 섬을 떠났던 아내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고, 참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더는 죽음을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며 극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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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페스트(2018)’ ⓒ뉴시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앙은 연극과 현실 모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강력한 전염병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곳곳으로 퍼져나가 두려움의 대상이 됐지만 그만큼, 아니 때로는 그 이상으로 두려운 것이 또 있었다.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연극 ‘페스트’에 나타난 인물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익숙하다. 작품 속 인물 코타르는 혼란스런 상황을 악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고, 평소엔 늘 빈둥대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장 타루의 경우 오히려 목숨을 걸고 자발적으로 봉사를 한다. 또, 취재를 위해 잠시 섬에 왔다 고립돼버린 랑베르는 섬을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 하다 좌절된 뒤로 페스트에 대항하는 인물로 변모한다. 랑베르의 경우 심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계기가 극 중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 약간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이 역시 희생적 인물로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장벽을 사이에 두고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이용하는 모습 또한 씁쓸하게 다가왔다. 원작에 없던 장벽이란 실체를 작품에 넣은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가로막혀 버렸다. 매일 늘어가는 확진자 수에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혐오와 분노, 차별은 사람들의 편견이 때로는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일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드러난 연대와 희생은 결국 어떤 위기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한다. 무거운 내용이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느껴진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 최윤영(평론가/아나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의료진이 코로나19와 맞서 싸우고 있다. 모두의 노력으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요즘,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눈부시게 빛난다. 백신이 개발되고 상용화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예상되는 만큼 철저한 개인별 예방과 대비는 필수다. “코로나19 이전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말은 그동안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상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런 가운데 연극 ‘페스트’는 여러 상황에 지쳐있던 우리에게 한 발자국 물러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두려움을 이겨낼 힘이자 용기로 새로이 다가온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시금 일상과 마주하게 되면, 익숙한 평범함에 가려져 바로 보지 못했던 삶의 가치들을 좀 더 소중히 여겨리라 굳게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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