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글 써서 먹고삽니다.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첫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러니까 어린이집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묻는다. “나는 왜 한글이랑 수학 안 해?” 친구 대부분이 학습지로 한글과 수학을 공부하니까 물어본 것 같다. 그러더니 자기도 한글이랑 수학을 하고 싶단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애써 무시했다. 취학 전에 사교육 붙여가며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좌파 아버지로서의 신념 때문이다.

오해가 있을까 싶어 말하는데, 사교육 자체를 악惡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애들도 사교육으로 피아노와 미술을 한다. 단 입시 교과 관련 사교육은 시키지 않는다는 게 내 소신이다. 대학 서열화로 인한 극악의 입시 경쟁, 부모의 불안감을 부추겨 이윤을 추구하는 사교육 시장, 그 아수라장에 내몰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들어가는 청소년들. 좌파 사회주의자라면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공교육 정상화를 외쳐야 하지 않겠나. 입으로는 공교육 강화 운운하면서 뒤로는 자식들 조기교육에 입시 사교육 시키고, 특목고∙자사고 보내고, 불법 탈법으로 입시용 스펙 만들어주면, 이 얼마나 이율배반인가.

아무튼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어린이집에서 제일 인기 많은 아이가 ◯◯◯이라는 얘기를 첫째 딸에게 들었다. 왜 인기가 많냐고 물어봤더니 한글과 수학을 제일 잘해서 그렇단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 그래서 한글이랑 수학을 하고 싶다는 거구나. 어린이집의 다른 애들은 할 줄 아는데, 자기만 모르니까 기분이 안 좋았구나. 아이에게 공부 스트레스 안 주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예측 못 한 방식으로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자존감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좋겠다 싶어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7살짜리 첫째가, 친구들은 다 학습지 하는데 자기는 왜 안 하느냐며, 자기도 하고 싶다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고로 내 페이스북 친구는 대부분 좌파 성향이다. 댓글 의견은 대체로 비슷했다. 사교육 안 시키려는 신념에는 공감하지만, 아이가 하고 싶다는데 시켜주는 게 맞지 않느냐는 거였다. 한 페이스북 친구는 ‘학습지노조로 연락주시면 안내해드리겠슴돠’라며 과감하게 영업도 들어오더라(흐흐).

내가 생각하기에도 애가 먼저 하고 싶다는데 부모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막는다면 뭔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사교육을 시키는 것도 내키지 않아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일종의 절충안을 도출했다. 내가 직접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자.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알려주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직업이 작가다 보니 집에 있는 시간도 많아서 적당한 교재를 구해 당시 7살 아이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쳤다.

부모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뼛속 깊이 깨닫는 과정이었다. 하루에 교재 1~2쪽 정도만 하는 데도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지고 화도 냈다가 아빠가 잘못했다고 아이에게 사과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전보다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아빠도 아이와 함께 조금은 성장한 것이다.

어느덧 아이들이 훌쩍 커 첫째 딸은 초등학교 5학년, 둘째 딸은 2학년이다. 학교에서 종종 받아오는 채점된 시험지를 보면 꼭 몇 개씩 틀린다. 학부모 사이에서 누구누구는 공부 잘하더라는 얘기가 도는데, 우리 애들 이름이 나온 적은 없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반 친구 대부분이 국영수 학원에 다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애들보다 공부량이 적을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려나.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는다. 일단 자존감에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진도를 잘 따라가고 있으니 초등학생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싶다.

사실 솔직히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우리 애들에게 특정 분야에서 지독한 조기교육을 시키고 있다. 바로 미각이다. 나의 꿈은 우리 딸이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유수의 와인 회사들이 딸에게 와인을 보낼 것이고, 나는 그 와인을 딸 대신 마시는 것이 인생의 큰 그림이다. 이 가슴 뛰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없는 살림에 무리해서 돌돔 회, 찰광어 회, 괴도라치 회, 안창살, 항정살, 킹크랩, 랍스터, 애플망고 빙수 등을 아이와 함께 먹으며 혹독하게 미각 훈련을 시킨다. 와인은 일단 향기 위주로만 경험치를 쌓고 있다.

이 미각 훈련은 엄청난 장점이 있는데, 훈련의 강도가 올라갈수록 가족 간의 대화가 많아지고 더 많이 웃으며 사이가 돈독해진다는 점이다. 훈련의 성과 덕분인지 첫째 딸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와사비 간장에 찍어 먹는 '돌돔 회'를 즐기고, 단맛 나는 음식은 맛이 없다며 멀리한다. 수학으로 치면 초등학생이 이미 미적분 푸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진심 뿌듯하다.

첫째 딸이 얼마 전 학원에 다녀보고 싶다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엄마 아빠를 봐라, 책 쓰고 강의할 때 누가 가르쳐주더냐,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진짜 공부다, 라고 일단 설득했다. 솔직히 아이가 중고등학교 진학해서도 학원에 다니겠다고 얘기하면, 그때는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얘기했다시피 부모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아이의 의견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미각 훈련에 집중하고 싶다. 가족은 문자 그대로 식구食口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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