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지난 3월에 에세이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을 출간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저자로서 보람을 느낀다. 마르크스주의 책을 여러 권 쓴 사회주의자가 무슨 부르주아 식문화 탐닉이냐는 까칠한 반응을 우려했는데, 와인이 대중화되어 저변이 넓어지다 보니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다행히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변호사인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포도밭 두 곳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자신이 엄청난 와인 애호가였다. 그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샤토 마고 1848 빈티지라고 답할 정도로 와인홀릭이었고.

마르크스가 와인 애호가여서 와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2015년 9월 6일에 한 와인의 맛과 향에 제대로 ‘취향저격’ 당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그날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유독 강렬했다. 대책 없이 해상도만 높은 혓바닥이 와인 한 병을 만나 진도 9.0의 지진을 경험했으니까. 이후 유전자 레벨의 본능에 몸을 맡겨 가산을 탕진했고, 그런 좌충우돌 경험을 살려 와인 체험 에세이를 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취향이란 인생의 방향과 경로를 가리키는 나침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와인도 그렇지만 일단 마르크스부터가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으니.

소싯적 획일화된 입시교육에 길들어진 나는 학력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명문 대학 인기 학과에 입학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에 내 몸을 맞췄을 때 좋은 평가를 받고 몸값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그럴싸한 간판을 달았지만, 곧 끈 떨어진 연처럼 이리저리 방황했다. 명문대 대학생이라는 막연한 꿈을 이루니, 구체적 꿈이 없어져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읽게 된 마르크스 <자본론>은 정규교육을 통해 형성된 세계관 일체를 뒤흔들었다. 입시교육을 통해 강압적으로 주입된 지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찰을 보여준 마르크스주의를 접하며, 처음으로 지식에 대한 강렬한 취향이 생겼다.

취향이 생기면 맛을 구별하게 된다. 배가 고프니 먹는 수준을 넘어, 맛을 추구하는 의식적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더 맛있는 지식을 경험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고, 그것으로 부족해 80년대 운동권 서적을 찾아 헌책방을 이곳저곳 뒤졌다. 맛을 아는 몸이 되니, 삶의 방향도 크게 바뀌었다. 결국 경제적인 안정은 줄 수 있을지언정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사회과학 책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었다.

맛을 알게 된다는 것, 취향이 생긴다는 것은 삶의 근본이 뒤흔들리는 경험이다. 내가 지식의 참된 맛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전히 적성에 맞지 않는 무미건조한 직장생활을 이어나갔을 것이고, 취향을 추구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는 인생의 참맛을 느끼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기로 일관했겠지. 그런 식으로 내내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아무리 통장 잔고가 늘어난다 한들 그 삶에서 어떤 가치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취향에 이끌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맛에 이끌려 와인 에세이를 썼다. 호주머니 사정이 후줄근할 수밖에 없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와인에까지 맛을 들이니, 로또가 당첨되지 않는 이상 이번 생에서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기대하기 어렵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상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취향이 직업이 되어, 삶이 너무나 맛있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기쁨을 길어 올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야말로 취향 만세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