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소싯적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별다른 고민 없이 교회에 다니다가 궁금한 게 생겼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을 창조했고 전지전능하다는데, 자신이 창조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을 걸 당연히 미리 알았을 것 아닌가. 사정이 그러하면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벌주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예정된 미래대로 행동했을 뿐이니 말이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는 준비된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 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전제가 틀린 것 아닌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는 하느님이 미래의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뭔가 앞뒤가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튼 ‘자유의지’는 오랫동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속성으로 여겨진 것 같다. 신의 뜻조차도 거스를 정도의 높은 독립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니 말이다. 옛사람들은 대체로 물질과 정신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며, 물질보다 정신을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던 듯하다. 육신은 정신을 담는 그릇일 뿐이며 육신은 썩어서 사라지더라도 정신은 영원하다는 식의 격언들이 그러한 생각을 잘 담고 있다.

하지만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정신이 사실은 단백질로 구성된 뇌세포의 복잡한 연결구조와 신진대사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졌고, 심지어는 인간에게는 사실상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자유의지가 없다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나는 지금 나의 자유의지로 이 글을 읽고 있으며, 언제든지 자유의지를 발동해 읽던 것을 멈출 수도 있는데!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83년 벤저민 리벳이 주도한 자유의지 관련 실험은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피험자에게 내키는 때에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단순한 실험인데,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와 연관되어 세 가지 시각을 측정했다.

①피험자가 손가락이 움직이는 시각

②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마음먹는 시각

③손가락 운동과 연관된 뇌파가 나타나는 시각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실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예상할 것이다. 일단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마음먹고(②), 그에 따라 손가락 운동과 연관된 뇌파가 발생하고(③), 그 결과 손가락이 움직인다(①). 즉 ②-③-①의 순서 말이다.

하지만 실제 실험 결과는 달랐다. ③-②-①의 순서, 그러니까 일단 손가락 운동과 연관된 뇌파가 먼저 발생한 후(③),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마음을 먹고(②), 손가락이 움직였다(①). 내가 마음도 먹기 전에 뇌파가 먼저 뜬다고? 이게 사실일 경우 누군가 나의 뇌파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만 있다면 내가 손가락을 들겠다고 마음먹기도 전에, ‘당신은 잠시 후에 손가락을 들어 올리겠다고 마음을 먹을 것이야’라고 예언할 수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내가 ‘자유의지’라고 느끼는 이 내적 감각의 정체는 뭐지?

리벳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사람이 손가락을 들겠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무의식’을 담당하는 뇌 영역에서 손가락을 드는 행위와 연관된 뇌세포의 신진대사가 발생하는데, 그것이 해당 실험에서 뇌파의 형태로 관측된다. 그 무의식 영역의 작용이 뇌세포의 연결구조를 통해 의식을 담당하는 뇌 영역으로 전해지면, 해당 영역의 뇌세포가 활성화되면서 그제야 뒤늦게 손가락을 들어야겠다는 ‘자유의지’가 생성된다. 그러니 순수한 자유의지로 손가락을 들었다는 느낌은 일종의 착시현상(착각)이며, 무의식 영역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이 의식의 영역에서 뒤늦게 ‘자유의지’라는 형태로 떠오른 것뿐이라는 의미다.

알다시피 우리의 정신은 ‘의식’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의식 저 너머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잠잘 때 꾸는 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꿈을 마치 영화처럼 관람한다. 만약 꿈이 ‘의식’의 작용이라면 직접 쓴 소설처럼 내용을 이미 다 알겠지만, 꿈은 무의식의 작용이기 때문에 의식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전개될지 알 수가 없다. 무의식이 제작한 영화를 의식이 관람하는 것, 그것이 바로 꿈이다. 의식은 내 정신 활동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암시하는 이 실험 결과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고결한 ‘자유의지’를 통해 삶을 개척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단지 단백질로 이루어진 뇌세포 신진대사의 결과물이며 착시현상이라니 말이다. 고귀한 존재에서 단백질 덩어리로 전락하는 불쾌한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고,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합세해 자유의지를 살려낼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는 없을지 몰라도 ‘Free Unwill’은 있다는 해석이 있다. 손가락을 세우라는 무의식의 명령이 일단 의식의 영역에서 ‘자유의지’라는 형식으로 떠오르게 되니, 바로 그 순간 의식이 무의식의 명령을 검토하고 기각할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요컨대 ‘Unwill’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진다는 의미다.

얼핏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유물론적으로 철저하지 않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의식이 그런 방식으로 무의식의 명령을 검토하고 기각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Free Unwill’ 작용 역시 의식을 담당하는 뇌세포 신진대사의 결과물일 것이다.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물질로 구성된 뇌세포의 활동이니 말이다. 만약 의식 영역을 담당하는 뇌세포 연결구조 및 전기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다면, ‘Free Unwill’이 작동하기 전에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학자들이 ‘자유의지’를 뇌세포라는 물질로부터 분리해 구출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정신을 물질과 구분하여 신비화하던 신화와 종교 시대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물질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유물론적 관점을 수용한다면, 일련의 정신 활동이 있기 전에 그 정신 활동의 원인이 되는 물질(뇌세포)의 신진대사가 앞서 존재하는 것은 자명하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러한 전복적 통찰이 주는 사회적 의미는 가볍지 않다. 예컨대 너는 이 사람을 살해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너 자신의 자유의지로 사람을 죽였으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법의 기본 논리인데, 만약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논리가 무너진다. 무슨 얘기냐고?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특정한 순간에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은 내 뇌세포의 활성화 상태와 전류 흐름 때문이지 그 무슨 ‘자유의지’ 같은 게 있어서 죽인 게 아니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뇌가 그렇게 작동했을 뿐이고, 뇌가 그렇게 작동하게 되면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만약 내가 기억이 지워지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다시 완벽하게 동일한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나는 어김없이 사람을 살해하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뇌세포의 신진대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적 외적 변수 일체가 (물론 엄청나게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정확하게 같다면 당연히 뇌세포 활성화 및 전류 흐름도 동일할 것이다. 그렇게 뇌세포의 신진대사 일체가 동일하다면 그 결과 똑같은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모든 조건이 일치하는데 물리법칙과 생화학법칙을 거슬러 전기가 거꾸로 흐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또 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 내가 그 문제에서 3번이 아니라 4번을 찍었어야 했는데!’ ‘내가 그때 다른 전공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때 이직했어야 했는데!’ 같은 종류의 후회는 의미가 없다. 모든 변수가 완벽하게 동일하다면, 나는 그 상황에서 또 같은 선택을 할 테니.

수년 전 경희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하던 때의 일이다. 유물론을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뇌과학 얘기가 나오고, 어쩌다 보니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강의를 듣고 마음의 큰 짐을 덜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과거에 했던 아쉬운 결정들 때문에 후회하고 괴로워했는데요. 오늘 강의를 들으니 설사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어차피 나는 같은 선택을 반복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니 굳이 과거의 결정을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유의지’의 부재가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계기가 되다니. 이 무슨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자유의지의 부재를 깨닫는 과정에서 뇌세포의 새로운 연결이 생성되고, 그 새로운 연결성을 통해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한층 깊고 넓게 바라볼 여유와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리라.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전근대적인 이분법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해석(자유의지)을 초래했다. 애초에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했으니.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 그 자체를 온전한 나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유의지 있음/없음이라는 소모적인 논쟁은 아침햇살에 눈 녹듯 사라진다. 나의 정신은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뇌세포의 연결 그 자체일 뿐이니까.

<첨언>

자유의지 논의에 양자역학을 끌어오는 경우를 보았다. 양자역학적 불확정성이 뇌세포에도 발현될 수 있으니,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결정론적 해석은 잘못됐다는 얘기인 것 같다. 일단 양자역학적 불확정성은 소립자 수준의 미시세계에서 관측되는 것이지 뇌세포 수준의 거시세계에서는 고려할 변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령 폭포를 관측하며 물이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현상을 논하는데, 폭포를 구성하는 물 분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일일이 고려한다면 그 얼마나 소모적이며 불필요한 일이겠나.

인간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 분자들이 물 위의 꽃가루처럼 무작위 운동(브라운 운동)을 하는데, 이러한 요소가 뇌세포의 신진대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견도 보았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식의 결정론적 해석은 이 무작위운동을 고려하지 못해 오류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단백질의 무작위운동이 뇌세포의 신진대사에 얼마만큼의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백번 양보해서 그러한 단백질의 무작위운동이 뇌세포 신진대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변수라 치자. 그렇다고 해서 주사위 던지기 같은 무작위운동에 ‘자유의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