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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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인터넷을 뒤적이다 보면 주워 모으게 되는 잡다한 상식 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우리 몸이 ‘선택적 불용’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가령 왼쪽 시력을 아끼겠다고 오른쪽 눈만 뜨고 다닌다면 외려 몸은 왼쪽 눈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왼쪽 시력을 퇴화시켜버린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몸의 학습 능력은 우리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곤 한다. 몸이 망가지거나 노화하면서 얻게 되는 갖은 통증들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잠복해 있다가 치료 과정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경험은 또 어떤가. 그 통증들을 항시 액면 그대로 감각한다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몸은 아예 통증에 둔감해지는 법을 학습한다.

몸 바깥의 힘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둔감함을 학습하며 살아가고 있다. 당장 몸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그러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중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에 대한 저항이 그러하며 여러 사물과 부딪치거나 접촉하며 발생하는 마찰력이 그러하다. 우리 안에 숨은 통증과 우리 주변을 둘러싼 힘들에 무심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일상은 굴러가지만, 그 모든 것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범람할 때는 어찌해야 할까. 신철규의 시집 『심장보다 높이』(창비 2022)는 견딜 수 없는 것들, 둔감해질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하고 학습하기 위한 밀도 있는 지침서로 읽힌다.

우리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인 심장이 하는 일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뛰는 것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만물을 잡아당기는 중력을 거슬러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이 멈췄을 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지 시인은 가만히 묻는다. “물이 심장보다 높이 차오를 때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무의식중에 손을 머리 위로 추켜 올”리게 되듯이, 생의 절박함을 가늠하게 하는 한계선과도 같은 심장의 주변 어디쯤에 우리의 영혼 또한 맴돌고 있을 듯하다(「심장보다 높이」).

“우리가 서로를 안을 때 네 심장은 내 심장보다 조금 아래에서” 뛰고 있어서 “같은 높이에서 뛰기 위해 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는 순간을 시인은 붙들기도 한다. 서로의 심장이 같은 높이에 뛰게 하려는 발돋움으로부터 마음이 마음에 가까이 닿으려는 안간힘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만큼의 안간힘만 있다면 “닫을 눈꺼풀이 없어서/무서워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들”을 헤아리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빛의 허물」). 그런가 하면 심장이 돌게 하는 피의 방향과 속도는 누군가의 복잡한 속내를 터져나오게 하기도 한다. “보기보다 견딜 만해요”라고 말하는 나를 향해 가만히 웃던 이는 불현듯 “얼굴로 갑자기 피가 몰리더니 (…) 깨진 거울처럼 울었다 바닥에 흩어진/거울의 파편 속에 조각난 내 눈동자를 찾으려고 고개를 숙였다”(「복잡한 사람」).

시인은 “마음으로 와서 몸으로 나가는 것들/몸으로 와서 마음에 갇힌 것들”(「해변의 눈사람」)이 밖으로 비어져나오고야 마는 순간들을 기민하게 포착한다. “살아 있는 나무”에 매달린 “죽은 잎”처럼 “썩기 전에 짙어지는 것들”(「그을린 밤」)에 마지막 남은 생기가 시에 고스란히 담긴다. 가령 삶의 갖은 압력에 짓눌려 “왼팔은 직각으로 구부러져 단단하게 옆구리에 붙어 있”고 “왼다리도 불편한지 발이 살짝 끌”리는 한 여자와 그의 아들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버스에서 함께 내려 서로의 고됨을 무심하게 나눠 지고 골목으로 사라져가는 풍경(「슬픔의 바깥」)을 시인은 가감 없이 서술한다. 그렇게 “물속에 밀어 넣어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풍선”처럼 “가라앉히려 해도 끝내 가라앉지 않는 것”(「약음기」)들을 향해 시인은 기꺼이 발돋움을 한다.

그러나 이런 안간힘에도 마음과 마음이 미처 닿을 수 없는 까닭은 “어디까지 망가질지 몰라 두려운 사람들이 선을 긋”기 때문이리라(「세화」). “신이 현미경으로 볼 때 인간은/지구라는 거대한 사탕에 붙은 먼지검불 같은 것”이건만, 인간은 서로에게서 한사코 떨어지기 위해 애를 쓰는 듯하다. 서로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려 “손에는 투명 비닐장갑을 끼고 눈먼 사람처럼 서로의 얼굴을 더듬을 것이다”(「인간의 조건」). 그렇기에 누군가에 가 닿으려는 몸짓은 “물속에 손을 넣으려고 하면/손을 잡기 위해 떠오르는 손”(「불투명한 영원」)처럼 대상을 찾을 수 없는 부질없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깍지 낀 손에 머리를 기대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악수할 손을 잃어버린 사람이다”(「악수」). 그럼에도 시인은 갈 곳을 잃은 손으로 끊임없이 세계를, 사람을, 마음을 움켜쥐려 한다. 심장의 박동, 손의 온기, 마음의 울림을 잃지 않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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