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개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버펑크 영화의 대표작으로서 복제인간 ‘리플리컨트’와 인간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근미래를 그리고 있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해 ‘저주받은 걸작’으로도 불리는 이 영화의 백미는 두 진영의 싸움보다도 주인공이 사랑하게 되는 레이첼, 즉 자신이 리플리컨트라는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도 그저 인간으로 보이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향해 던지는 아이러니에 있다.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를 판별하는 테스트에서 그녀는 오히려 인간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기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의 후속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는 리플리컨트이면서 리플리컨트를 추격하는 K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임무 수행 도중 리플리컨트가 출산을 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이를 추적할수록 자신이 바로 그 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K가 사용하고 있는 AI 운영체제가 K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인간 여성을 고용해 자신의 홀로그램 이미지를 도킹한 뒤 K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장면은 자신이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그 복제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하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아닌 저 기이한 자리를 기꺼이 감내하는 K의 처연한 모습은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닌 리플리컨트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우신의 시집 『홍콩 정원』(현대문학 2021)은 영화 속 K의 그 이후의 삶이라고 해도 좋을, 리플리컨트가 자기 존재를 깊이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는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당장 눈에 띄는 부분은 ‘건봉사의 항아리를 정리하는 비구니 리플리컨트’, ‘신내림을 연습하는 리플리컨트’, ‘만리포 여관에 버려진 리플리컨트’와 같이 시들에 붙여진 부제들이다. 그의 시 속에서 리플리컨트는 홀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수행하는 구도자 혹은 수도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비구니가 되거나, 무당이 되거나, 낡은 여관을 청소하면서, 리플리컨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탐구하고 그에 따르는 적막을 시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리플리컨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란 인간의 삶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관계는 “죽은 자만 보여서 고통스러운 신병과 살아 있는 자만 보여서 고통스러운 가스실의 책임자”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생화학교실―리플리컨트의 탄생」). “사람과 개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 호스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는 리플리컨트는 스스로를 인간과 개체 사이에 놓인 존재, 혹은 개체-인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법하다.

“갈대와 억새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무언가가 “인식이 되지 않”는 텅 빈 눈동자를 가진 채로 “나는 내가 응시하는 것을 느낄 수 없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리플리컨트의 우울은 인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는 내면과 인간을 빼닮은 외형의 부조화가 주는 낯섦에서 연유한다(「변전소―리플리컨트 폐기」). 그러나 그러한 부조화 속에서도 그는 어쩐지 인간을 닮아있다. 그는 분명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이 아닌 것’ 또한 아니라는 점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마침 시집의 후기로 실린 에세이에서 시인은 “인간이면서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것, 리플리컨트이면서 리플리컨트스럽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과 우울”일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과 우울을 겪는 순간 인간도 리플리컨트도 자신의 존재 지평으로부터 어디론가 홀연히 이탈해버린다.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리플리컨트의 슬픔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대상을 잃어버린 감정, 궤도에서 벗어난 관계, 영영 황폐해진 세계 등으로부터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낯섦을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인간의 범주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은 우울을 심화시킨다.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인간 또한 자신을 지배하는 내면과 자신의 외형이 불일치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며 그럴 때 인간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것이기도 한, 흡사 리플리컨트와 같은 존재로 변모한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불가피하게 공유하는 이 이질적인 세계에서 “끊긴 꿈으로부터/재생되는 살점”(「홍콩 정원」)이 차오르고, “목숨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불행을 물려줄 수 있었던 인간의 마지막 세기”(「액화질소탱크」)가 애도 속에 떠나보내진다.

리플리컨트가 발신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닮은 존재에게만 허락된 세계를 향한 우울과 슬픔은 분명 우리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친숙한, 인간을 살게 하는 세계를 인간 스스로 떠나보낸 뒤에 밀려오는 상실감을 겪고서야 우리는 리플리컨트의 내면이 우리의 내면과 얼마나 흡사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진화처럼 앞에/있는 척/뭔가 할 일이/남아 있는 척” 굴어보지만 “이제 인간의 계절은 누가 바꾸나”(「대왕나방-리플리컨트의 멜랑콜리」)하고 묻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떠밀려온 우리가 그저 쩔쩔매며 후회하는 동안, 리플리컨트는 묵묵히 그것을 서술하고 묘사하고 설명하며 인간 다음의, 인간 너머의 존재론을 예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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