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lt;착한 자본의 탄생&gt; 저자<br>-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현대제철은 총 12조원이 들어가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면서 모든 자금을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증자하거나 그룹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대략 6조원은 내부자금으로, 나머지 6조원은 국내외 장기 차입금으로 해결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자금 담당 임직원들이 자랑스럽다. 당시 CFO(K 부사장)가 건설 기간 동안 기존 전기로 사업에서 수익 창출을 잘 리딩했고 모든 임직원이 혼신의 노력을 바쳤다. 그러한 노력으로 2008년에는 영업이익률이 12.3%나 됐다. 그렇지만 국가도 하기 어려운 규모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금융시장에 신호가 잘못 전달되는 순간 급격한 위기를 맞게 된다. 좋을 때는 서로 저금리로 대출을 해주겠다고 하지만, 조금만 이상하면 서로 회수하려고 하는 게 금융시장이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안전한 게 내부자금 조달이다 보니 회사는 각 부문에 혹독한 원가절감을 요구했다. 당연히 일관제철소 추진으로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기존에도 거의 없었던 홍보예산은 늘어나질 못했다. 골프는커녕 저녁에 만나자는 기자들의 전화가 두려웠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 난감했다.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낸 게 일요일에 점심을 사는 거였다. 당시 신문사는 토요일은 쉬고 일요일은 월요일자 신문 제작을 위해 출근했다.

기자들과 만날 때는 항상 룸(ROOM)이 있는 식당으로 가야 했다. 우선 짧은 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조용하고 비밀이 유지돼야 한다. 방값이 포함되므로 식사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는 점심 단가의 3배가 기본이다. 식사 중에도 기자는 오후에 마감할 기사 취재에 집중해야 하므로 본인이 필요한 정보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일요일 점심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우선 비용이 적게 든다. 이때는 언론사 인근 대중식당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저렴한 식사가 가능하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부장과 차장 그리고 다른 기자 등 여러 명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만난 기자가 나중에 철강을 담당하기도 하고 또 다른 부서로 가도 인연이 이어진다. 기자는 전혀 모르는 경우, 얼굴은 아는 경우, 식사를 같이해 본 경우, 술을 같이 마셔 본 경우에 따라 긴급 시 통화 서비스가 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휴일 식사를 같이하는 것은 홍보맨 입장에선 큰 보험을 들어놓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들 평일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잘 전달이 된다. 미리 기자들, 특히 부장과 데스크 차장이 궁금해할 요소들을 준비했다가 자연스럽게 얘기를 풀어 갈 수 있다. 또 일요일에도 나와서 고생한다고 격려를 많이 해준다. 이러한 식사는 무엇보다 부장이 좋아한다. 빡빡한 부서 예산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한 번의 식사가 갖는 효용(?) 시간도 아주 길다. 일요일의 오찬은 저녁 한 끼의 식사 예산으로 데스크를 포함한 8명의 언론인과 여유 있게 식사도 하고, 내 얘기도 잘 전달하고, 칭찬도 받는 그런 식사가 된다.

이런 식사는 나에게는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가 있었다. 우선 일요일 만남에 대비해서 회사는 물론 경쟁사 동향과 현안 이슈, 정부 정책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 대정부 건의할 사항 등을 챙겨보게 된다. 그리고 시사 관련 이슈와 연관된 역사 서적도 찾아서 읽고 내 나름대로 스토리를 세팅하게 하게 된다. 시중에 흔히 도는 지라시 수준이 아니라 내 나름의 논리(관점)로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그때 현대제철 김 부장이 그랬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었던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 모습 [사진제공=ESG네트워크]
필자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었던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 모습 [사진제공=ESG네트워크]

여담이지만 휴일에 광화문에 있는 언론사 근처로 갈 때마다 ‘홍보팀장인 나는 참 좋은 동네(혜화동)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일과의 시작은 토요일에도 새벽 4시 반 기상, 6시 전에 양재동 사무실에 도착하는 삶이었다. 정몽구 회장도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일요일은 9시 기상, 10시경 집을 나와 광화문까지 걸어간다. 교보문고에 들러서 1시간여 신간 서적과 베스트셀러 동향을 살펴보고 또 식사 때 풀 썰(說)에 참고할 서적도 살펴본다. 약간의 낮술을 겸한 식사가 끝나면 경복궁, 창덕궁, 삼청동, 감사원, 성균관대, 창경궁을 거쳐 집으로 걸어온다. 봄이나 가을에는 그 자체가 꽃길 단풍길 여행도 된다. 그리고 혼자의 걸음은 복잡한 생각이 맑게 정리되는 그런 걸음이다.

홍보맨 입장에서 집이 언론사가 밀집한 광화문에서 가까운 이점은 또 있다. 당시는 가판을 보고 언론사로 뛰어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가게 되지만 일요일에는 팀원들이 거의 다 외곽에 거주하는 관계로 광화문까지 오기가 힘들다. 사태를 알고 오더라도 기자들은 이미 퇴근한 뒤가 된다. 그렇지만 나는 차로 10분이면 도착하니 기자나 데스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이 많게 된다. 그러다가 서로 기합이 되면 맛있는 소주도 한잔하면서 친밀도도 높이게 된다. 가끔 회사 당직자가 어려울 때는 동아일보 1층 바닥에서 신문 가판을 볼 때도 있었다. 이런 일은 그 시절 모든 회사 홍보맨의 일상 중 하나였다. 나의 경우 대략 2005년부터 2013년 사이의 일들이었다. (참고로 팀원들은 절대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일요일에 밥을 사는 것은 많은 언론인들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또 그들은 많은 홍보 임원들에게 나의 사례를 추천했다. 특히 갑자기 홍보 임원을 맡게 된 경우에는 언론인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C 일보 S 선임기자에 의하면 ‘그런 임원들에게 나의 사례를 들려주면 무릎을 치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고 그 후 어떤 임원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그 회사는 예산도 풍족했고, 절박함도 없는 회사였을 것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 주어진 예산 제약하에서 효율적으로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많은 분의 칭찬을 받았고, 또 많은 언론인이 그 정성이 가상해서인지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었다. 그 도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현대제철 기사에 더 엄정을 기하고, 우리가 잘 못해서 채찍을 들 때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경우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줬고, 또 어떤 때는 정부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도 했다. 참으로 보람되고 고마운 일이었다. 이렇게 쌓인 인연으로 퇴직한 지금도 많은 언론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소주를 사고 있다.

일요일 언론인과 식사후 귀가 길 코스인 성균관대학교 은행 단풍.&nbsp; [사진제공=ESG네트워크]
일요일 언론인과 식사후 귀가 길 코스인 성균관대학교 은행 단풍.  [사진제공=ESG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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