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lt;착한 자본의 탄생&gt; 저자<br>-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2010년 5월 1일부로 임원 승진 명령이 났다. 직장인으로서 임원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즈음 한 직원(L)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CEO 전문 컨설턴트로 유명한 이종선 님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였다. 읽고 또 읽었다. 밑줄을 그으면서 읽고 형광펜으로 칠을 하면서 또 읽었다.

2004년 홍보팀장 발령 이후 이날까지 주위를 전혀 보살피지 못했다. 집안 대소사는 당연히 내조자의 몫이었고, 아이들의 학년을 모를 때도 있었다. 친구 부모의 경조사도 거의 놓쳤다. 이때의 결례가 지금까지도 회복이 안 되는 친구도 있다. 일 중독자인 필자의 스타일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지만, 이 책을 계기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많은 도움이 됐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선물’에 관한 글이었다.

“선물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상대가 가장 심취해 있는 것, 가장 기뻐할 만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런 노력이 느껴지면 상대방은 감동을 받는다.”, “그 선물에 내가 행복해하는 이유는 공짜여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역시 선물의 진수는 메시지다.”, “우리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을 주고받을 줄 알게 된다면 그 애정과 고민의 시간 덕분에 선물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로 빛난다.”

2006년 10월 27일 당진제철소 기공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제철소 모형설비 앞에서 격려하는 모습 [사진제공=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
2006년 10월 27일 당진제철소 기공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제철소 모형설비 앞에서 격려하는 모습 [사진제공=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이 글을 읽으면서 지나간 큰 두 행사 때 정몽구 회장의 선물이 생각났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했던 일관제철소 기공식 때 선물은 ‘압력밥솥’이었다. 대(大) 재벌 회장님이 아버지 정주영 창업 회장도 못했던 일관제철소를 시작하는 기공식에 직원과 지역 주민은 물론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들에게 줄 선물로 ‘압력밥솥’을 결정한 것은 너무나 의외였다.

당시 선물을 담당한 총무팀이 같은 사무실에 있어서 그 과정을 좀 알게 됐다. 처음에는 약 100개의 샘플이 회의실을 가득 채운다. 팀장, 임원, 본부장, 사장, 부회장을 거치면서 3개 정도로 압축이 된다. 그룹 기조실에 전달하면 다른 것을 찾아보라고 한다. 그러면 약 20개를 가지고 다시 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보고를 받은 회장은 다 마음에 들지 않자 당신께서 직접 결정해 준 게 ‘압력 밥솥’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선물에 대한 깊은 생각이 있었다. 1)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2) 필요는 한데 내 돈으로 사기에는 주저된다. 3) 현대제철 행사이므로 쇠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 4) 주고받는 데 부담 없는 가격대여야 한다.

회장이 직접 선물을 결정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이 일로 사직을 당한 임직원은 없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아무도 이 일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nbsp;2010년 4월 8일 당진제철소 고로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내빈들이 축하 세레머니를 하는 모습&nbsp;[사진제공=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
 2010년 4월 8일 당진제철소 고로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내빈들이 축하 세레머니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4년 후 고로 1호기 준공식을 앞두고 선물 담당으로 필자가 지정됐다. 당시 나는 홍보 업무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는데 대외업무가 추가됐다. 당일 일은 당일 일정표에 따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몸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도 지역 주민은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 등이 참석하는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정주영 창업 회장의 일관제철소에 대한 집념·추진·실패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 인지라 그 긴장감은 기공식 때와는 비교가 안 됐다.

예정된(?) 임원 승진을 앞두고 리스크가 크지만 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직원이 바쁜 관계로 다른 팀에 있는 믿을 만한 직원 두 명(H, K)을 배속받았다. 이 두 직원은 나에게 보고한다고 자주 왔지만 보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나 또한 경영진에 중간 보고를 하고자 했지만 그분들도 보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이 기준을 세우고 선정했다. 그리고 2만개를 제작하기 위한 자재와 공장 가동을 준비시켜 놓았다. 바빠서 보고도 못 받는 경영진을 대신해서 담당 직원이 스스로 판단한 결정이었다.

행사 5일 전 샘플 5개를 준비해서 회장님께 보고드리도록 당진제철소에 갔지만 회장님과 경영진의 회의는 끝없이 이어졌다. 할 수 없이 샘플을 회장님 동선마다 하나씩 갖다 놓고 대외 약속이 있어서 서울로 오는데 선물을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직원들이 설명해 준 대로 “회장님 ‘선물 관(觀)’을 기준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많은 고민 끝에 한 가지를 준비했는데 천만다행으로 그 한 가지로 승인됐다. 그 선물은 현대제철 스테인리스로 만든 ‘3단 냄비세트’였다. 두 직원의 혜안으로 포장 박스도 별도로 제작했는데 이게 또 히트했다. 다른 선물을 예상해서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몽구 회장의 선물 관을 반영한 당진제철소 준공식 선물&nbsp;[사진제공=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
정몽구 회장의 선물 관을 반영한 당진제철소 준공식 선물 [사진제공=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정몽구 회장은 하루 전에 “내일 오시는 손님들께 ‘따뜻한 피자’ 한 박스씩 드려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천안, 대전으로 몇천 개의 피자를 주문하면 되지만 드릴 때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밤새 오븐을 구하고 설치했다. 그리고 그 피자는 잘 준비된 포장지에 같이 담아드릴 수 있었다. 회장의 ‘따뜻한 피자’는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준공식 후 많게는 하루에 400명의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회장은 학생들에게 따뜻한 피자와 콜라를 선물하라고 했다. 의전실 옆에는 늘 오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의외의 선물에 학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회장은 기공식 때와 같이 준공식 선물을 언론사 경영진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지시를 해서 필자가 직접 다녔다. 다들 처음에는 ‘압력밥솥’과 ‘냄비세트’에 의아해했지만 회장의 선물 관을 전해드리면 무릎을 쳤다.

한편 홍보팀은 늘 예산 부족으로 시달렸다. 그렇지만 이제 고로 1호기도 준공했으니 경쟁사와 항상 비교됐다. 경쟁사는 (김영란법 시행 전) 회사 비용으로 매년 출입기자 수십 명을 해외 사업장 견학 겸 여행을 제공했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비슷한 요구가 들어오지만 여건이 안 됐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선물했다. 가족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당진 감자, 강화도 순무 김치, 안동 찜닭 같은 계절성 선물을 했다. 바빠서 집에서 거의 식사를 못 하는 기자들이 가족들과 같이 즐기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그리고 또 색다른 선물은 매년 10월 말 영주 부석사 여행이었다. 언론사별로 10여 명 같이 가는 제안이어서 많이 가지는 않았지만 한 언론사와는 10여 년 지속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한 권의 책이 나를 변화시켰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성공하는 리더의 공통점은 ‘사람’을 아낄 줄 알고, 진심이 몸에 밴 사람이었죠.” 정몽구 회장과 두 번의 큰 행사를 치르면서 나도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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