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형
▸팟캐스트 <이이제이> 진행자
▸저서 <와주테이의 박쥐들> <김대중vs김영삼> <왕의 서재>등 다수

도로명 주소는 김영삼 정부인 1996년 21세기를 대비해 국민의 편리성과 한국의 “도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기존에 있던 동, 지번을 폐지하고 도로명 주소를 쓰면 무엇 때문에 도시경쟁력이 강화될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정부는 이 정책을 밀어붙였다. 갑작스런 변화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시범실시도 해봤고 구 주소와 병기하는 정책도 실시했다. 그러면서 보완책을 마련했다는 것이 정부 측 주장이다. 그러나 올해부터 전면 실시된 도로명 주소는 극심한 혼란과 함께 우리 조상 네가 살아 온 동리의 문화도 파괴시키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주소로 생계수단을 이어가고 있는 택배, 우편, 배달, 카드업계 등의 종사자들이 새로운 주소로는 집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가 주장한 국민의 편리성은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스마트 폰이 전 국민에게 보급되어 있는 21세기에 편리성을 위해 새 주소체계로 전환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새로운 주소체계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라는 변명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로명 주소 자체가 우리의 생활환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도로명 주소는 도시계획을 미리 짜고 건설한 서구생활에 맞는 방식이지, 우리나라처럼 도로 위주가 아닌 구불구불, 골목골목 거미줄처럼 이어진 주택생활환경에는 전혀 맞지 않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선진국 모델을 들고 왔으니 혼란이 오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직접 발로 뛰지 않고 살아보지 않고 책상위에 앉아서 위쪽의 지시대로 안을 만들어 짜놓는 탁상행정의 전형이 바로 도로명 주소인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세계화”의 일원이 도로명 주소로 나타나지 않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100년 동안 이어져 왔던 주소체계를 이 어찌 간단히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 동, 번, 지가 일제의 잔재였기 때문에 개편했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하는 모양인데 이것도 어불성설이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마을을 자기들 편한 데로 한자어로 바꾸었지만 뜻은 변하지 않게 했다. 즉, 안동 물돌이동은 하회마을(물이 돈다는 뜻) 로 대나무골은 죽전리로(대나무 밭)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도로명 주소는 어떤가? 우리가 그동안 숨 쉬고 살아왔던 동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 그동안 동네 이름만 들어도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있고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늠할 수 있었던 우리 고유의 지명을 편리성과 경쟁력이라는 미명아래 즉흥적으로 없애버렸다. 일제보다도 더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서 새로 만들어낸 도로명 주소는 “스포츠로”, “웰빙길”, “엘씨디로” 등의 국적불명의 이름들뿐이다. 이들 도로명이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가? 그 마을의 전통을 나타낼 수 있는가 말이다.

17년이라는 장기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문제점은 들여다보지 않고 장점을 부각시키는데 급급했던 것이 이 나라 정부였다. 반대론자들의 반발에 “길 찾기가 쉬워 화재나 범죄 등 긴급 상황에 조속히 대응할 수 있고 시간·물류비 절감, 사회·경제적 비용 감소, 국가경쟁력이 강화 된다.”는 도입당시의 주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새 도로 주소를 사용하면 연간 4조 3천억의 경제효과도 본다고 자랑했다. 그 산정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제대로 된 시뮬레이션, 국민들의 반응, 시행착오에 대한 혼란 등의 문제점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돈은 얼마나 들어갔는가? 2007년까지 들어간 돈만 1600억 원이 넘고 사업 십년이 지난 올해는 4000억 원의 혈세가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많은 세금이 이 사업에 쓰일지 모른다는 것이 더욱 암울한 일이다.


2000년대 중반, 도로명 주소는 대표적인 예산낭비 사례로 지적되어 폐기되었던 법안이었다. 이것이 어떤 명분으로 다시 살아났는지 그래서 혜택을 본 사람은 누구인지, 국민의 혈세로 장난치고 나라의 돈은 눈먼 돈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인지 지금이라도 철저히 조사하여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엎질러진 물이라고 해서 잘못된 정책을 그대로 끌고 가는 어리석음도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했다. 새 도로명 주소는 파기하는 것이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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