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주도청 소속 문정훈 역도 선수

 

【투데이신문 이광명 기자】누구나 살면서 인생의 굴곡을 겪는다. 그 시련의 크기가 얼마이든 원인이 어디서부터 왔든,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본인의 몫으로 주어진다. 때로 너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을 보면 과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바라보는 이들마저 막막해 지기도 한다. 물론 스스로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북돋아주는 것은 주변에서 그들을 지지해주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 안전망이 될 수도 있겠고.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버팀목 말이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본인에게 닥친 역경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다는 문정훈 선수를 만나봤다. 문 선수는 두 다리를 쓸 수 없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건강한 마음을 가진 밝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장애인올림픽 단거리 육상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고, 핸드워킹으로 킬리만자로 등반을 한 이력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불가능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요즘 시대가 많이 어둡다. 온 나라는 눈물의 바다에 잠겨있고,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이에 대해 문 선수는 ‘관심’이 가장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그 장애를 이겨낸 것처럼 보였다. 그와의 이야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장애를 극복하는 법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을 듯도 싶다.

▲ 어쩌다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신 건가요?

- 제가 태어난 지 30개월 째 되던 때에 굉장히 많이 아팠다고 해요. 병원에서 치료를 하던 중 식물인간이 됐죠. 10개월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 깨어났는데 사지가 다 마비가 된 거예요. 세살정도 됐던 것 같은데 손발이 다 움직이지 않았죠. 그때부터 장애를 갖게 됐어요.

▲ 몸을 아예 움직이지 못했다면 많이 불편했을 것 같아요.

- 워낙 어렸을 때 장애를 얻어서 그랬는지, 원래 이런가 싶어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어요. 어릴 때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의식이 아예 없었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남들하고 내가 좀 다르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죠.

▲ 지금은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것 외에는 다 건강해 보여요. 어떻게 회복하신 건가요?

- 제가 그 당시에 머리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사지를 전혀 못 썼는데도 저희 어머니께서 꼭 학교에 가야한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께서 초등학교로 저를 업고 가셔서 운동장 바닥에 누워 입학식을 했죠. 입학식 날 어렴풋하게 만국기가 하늘에서 휘날리고 있던 장면이 떠올라요. 그 후로도 어머니께서 계속 저를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주셨고,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의자에 묶인 채로 수업을 들었어요. 대소변 보는 것은 친구들이 도와주고 그러면서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죠.
그러다 중학생이 되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거예요. 밖에서 떠드는 친구들의 소리도 들리고, 친구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함께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죠. 그러다보니 스스로 몸을 움직여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됐어요.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손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집에서 기어 다닐 수 있게 된 거예요. 신경이 조금씩 돌아오고 감각도 생겨났죠.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무엇보다 6년간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를 다니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어서 빨리 내가 건강해져서 자립을 해야겠다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더 운동에 애착이 갔어요. 그때는 육상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고, 단순히 내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서 어머니 고생을 덜 시켜드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던 거죠.

 

▲ 거의 누워만 지내다가 10년 만에 신경이 돌아온 셈인데요, 그 이후 2000년 시드니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해 육상종목에서 금메달까지 따셨어요.

- 처음엔 단순하게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죠.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예요.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TV에서 장애인학교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어요. 나도 저런 곳에 다녀보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들어서 일반학교를 잘 다니다가 갑자기 장애인 학교로 전학을 갔죠. 다니던 학교에서 잘 다니고 있는 학교를 왜 그만두느냐며 만류를 했어요. 장애인학교에서도 특수학교 학생들은 열심히 해서 오히려 일반학교로 가고 싶어 하는데 왜 오려고 하느냐며 저를 받아주지 않더라고요. 저희 집이 제주도였는데 비행기를 끊고 서울로 온 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렸죠. 그래서 결국 전학이 됐어요. 그렇게 1년 정도 특수학교를 다녔는데 오히려 그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다시 일반학교로 돌아갔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일반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지내다보니 저의 장애를 장애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살고 있었더라고요. 그냥 나는 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고 지냈고, 큰 불편함이 없었어요.
하지만 성장하고 나니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과 생각을 공유하며 지내보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들었고 힘들게 특수학교로 갔던 건데, 막상 가서 지내보니 그곳이 불편했던 거죠. 생활하던 환경과도 많이 다르고, 같은 반 친구들과 생각의 차이도 많이 났어요. 제가 구사하는 언어조차 그 친구들에게 상처가 될 때가 많더라고요. 친구들 사이에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놀림 같은 것들도 그 친구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결국 일반학교로 돌아와서 졸업을 했죠.
그런데 그 특수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휠체어 육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거예요. ‘아, 장애인도 저렇게 운동을 하는 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배웠어요. 일반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꾸준히 혼자서 훈련을 했죠. 자료를 찾아보니 일본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기에 일본에도 가서 배워오고 그랬어요.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휠체어 육상을 시작해서 거의 1년만인 1999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나가 1등을 했죠. 그리고 다음 해에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해서는 금메달을 땄어요.

▲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그토록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건가요?

-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집에서 굉장히 멀었어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했죠. 몸이 아파서 서 있을 수가 없었는데도 버스를 타면 다른 학생들이 저를 특별히 배려해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버스를 굉장히 힘겹게 타고 다녔죠. 버스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보니 공중에 매달려서 가고 그랬어요. 그게 너무 힘들다보니까 차라리 휠체어로 통학하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두 시간 씩 휠체어를 타고 등하교를 했어요. 제주도 지형이 약간 언덕이 져있거든요. 그런 길을 다니다 보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팔 근육이 많이 길러진 거예요. 휠체어 육상을 시작하고 보니 이미 몸이 많이 만들어져 있는 상태였던 거죠. 그래서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좀 쉽게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금메달을 목에 걸자 그간 힘들었던 기억들도 나고, 정말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네요.

- 솔직히 금메달을 따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장애인 체육이 일반인 체육에 많이 가려져 있다 보니까 행정적인 지원이나 관심이 너무 없었거든요. 지금은 제도가 바뀌어서 거의 같아졌지만 그 당시 비장애인은 금메달 연금을 매달 100만원씩 주는데 장애인은 30만원을 줬어요. 또 비장애인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인데 저희 장애인은 보건복지부 소속이었거든요. 장애인 체육을 체육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주무부서가 보건복지부였으니까 재활이나 의료에 가까웠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원이 굉장히 열악했어요. 방콕 아시안 게임과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장애인 선수들이 여인숙에서 합숙을 했거든요. 몸도 불편한 와중에 그런 시설에서 훈련을 하려니까 많이 야속하더라고요. 똑같이 국가를 위해 출전하는 선수들인데 왜 우리는 선수촌도 없고, 훈련을 위한 시설이 없는지 서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을 떠나서 우리나라는 육상이 메달 따기가 힘든 종목이었거든요. 아마 제가 딴 금메달이 88올림픽 이후 육상으로는 처음 딴 금메달일 거예요. 금메달을 따도 관심이 없더라고요. 물론 비장애인 스포츠에도 관심을 못 받는 종목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인기 종목들과 행정적인 지원 등은 동일하니까요. 그런데 저희 장애인 스포츠는 행정적인 차별도 심했고 관심도 못 받다보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슬펐죠.

   
 

▲ 육상 휠체어 자체도 굉장히 비싼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지원도 없었나요?

- 그렇죠. 경기용 휠체어도 자비로 구입해야 해요. 그 당시 1천만원 정도가 들었는데 어머니께서 사주셨어요. 저의 경우엔 감사하게도 가족들이 지원을 많이 해준 편이에요.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저는 존재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7남매 중 딸 여섯에 막내아들인데 누나들이 매달 용돈도 보내주시고, 운동에 필요한 장비들도 사주시는 등 하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주셨어요.

▲ 그렇게 힘들게 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아 많이 서운하셨을 것 같아요.

- 서운한 마음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사람들이 장애인 스포츠에 관심을 가져야 지원이 되잖아요. 이런 스포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투자도 하고 법도 정비가 되고 그럴 텐데 답답하죠. 안현수 선수처럼 비인기 종목이어서 나가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장애인 체육은 아예 선수생활 자체를 관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도 허다해요. 실력이 좋아 메달을 따더라도 운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갈 방편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계속 운동을 할 수가 없거든요. 이제 장애인 스포츠도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이라 연금이나 행정적인 지원은 비슷해지긴 했어요. 일반선수들에게 태릉선수촌이 있는 것처럼 장애인 선수들을 위한 이천선수촌이 건립됐고요. 시설도 굉장히 좋아요. 그렇게 지속적인 관심이 꾸준하게 이뤄져야 선수들도 마음을 놓고 계속 운동에 전념할 수가 있죠. 제가 시드니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땄을 2001년 당시만 해도 HOT와 함께 주인공으로 뮤직비디오도 찍고, 주병진 나이트쇼, 칭찬합시다 등 유명 프로그램의 섭외가 줄을 이어 들어왔었어요. 하지만 그 시기 뿐이더라고요. 여전히 휠체어 육상은 어렵고 장애인 운동 환경은 열악해요. 그런 반짝하는 관심은 사실 별 도움이 안되죠.

▲ 그렇다면 어떻게 지속적인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 첫째는 홍보가 중요해요. 지금은 홍보가 너무나 부족한 상태거든요. 제가 한체대 대학원 5학기 째인데 이 학교의 본관을 통해서만 강의실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 건물에만 좌우측에 휠체어 통행로가 있거든요. 국립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없는 거예요. 장애인 주차장만 해도 비장애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주차를 하고요. 학교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그곳에 주차를 하는 것이 편리하기는 하더라도 그런 것 하나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관심의 시작인 건데 많이 아쉽죠. 심지어 장애인들의 주 출입구에 주차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학교로 들어올 수조차 없어요.
또 우리나라 규정상 체대에서 장애인을 선수로 받아주지 않아요. 저는 지금 대학원생으로 다니고 있긴 하지만 학부생으로 입학하기는 힘들죠. 육상선수면 일반인과 장애인이 함께 육상트랙을 써야 하는데 일반인과 속도 차이가 엄청나서 사고 위험이 매우 높거든요. 저도 한 번 사고 난 적이 있었죠. 트랙에 그려진 라인만 보며 앞으로 속도를 내서 가는데 앞에서 뛰고 있던 선수를 받아버린 거예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큰 불편함 없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인프라 구축도 이뤄져야 해요.

비슷한 맥락에서 자꾸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분 지으려고 하는 모습들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장애인들이 불편할 것이라며 장애인들만 따로 모아놓고 가르치고 있어요. 예전에는 보건복지부 산하 복지진흥회를 두어 장애인 체육을 관장해왔어요.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대한체육회와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있어요. 한 카테고리 안에서 분리되는 것과 완전한 분리는 차이가 있다고 봐요. 늘 가까이 있으면 크게 다르다는 인식을 하지 못해요. 저희 누나들의 경우도 저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지내다보니 저에 대해 특별하게 여기지 않거든요. 그런 인식과 관련된 홍보를 할 필요성이 높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일반 체육은 돈을 주고도 관람을 하지만 장애인 체육을 돈 내고 보는 사람이 없잖아요. 장애인 체육을 관람하면 자원봉사 시간을 주는 등 혜택을 줘야 해요. 그렇게 자주 장애인 선수들을 접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줄 필요가 있죠.

무엇보다 장애인들을 위한 체육인들이 많이 없다는 것이 아쉬워요. 이번에 소치올림픽에서 장애인들이 메달을 전혀 못 땄어요. 준비를 많이 못했기 때문이죠. 그만큼 장애인들에게 소홀했다는 반증이에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역도종목도 선수가 없어요. 우리끼리 실력이 늘어도 선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니 우리가 은퇴하고 나면 아예 없어질 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죠.

선수 사후도 문제가 되고 있어요. 일반인들은 은퇴 후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선수 지도자도 많이 하는데 장애인들은 일반인 지도자로는 전혀 못 가고 있고, 장애인 지도자가 되기도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운동밖에 안 한 사람들이 은퇴 후 완전히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저도 사실 운동을 못하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은퇴한 장애인 선수들 대부분이 집에서 쉬거나 할 일이 없어요.

이 모든 것들이 다 관심에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관심을 가지면 어려움이 보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따라오죠. 그런 의미에서 홍보나 캠페인이 중요한 것 같고요.

 

▲ 올림픽 이후에는 육상에서 은퇴를 하고 뉴질랜드 유학을 다녀와 역도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 원래 학부 때 전공이 사회복지였어요. 사회복지사로 근무한 기간은 총 7년이고 제주시청에서는 사회복지사로 2년 반 동안 근무했어요. 뉴질랜드에 유학을 갔던 것도 사회복지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외국에 가니 언어도 잘 안 통했고 장애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는데 기회도 별로 없더라고요. 공부도 적성에 맞지 않아 헬스장이나 다녀보자 해서 갔는데 할 만한 운동이 역기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웨이트운동 뿐이었어요. 그렇게 학교 끝나고 바로 운동을 하러 가서 남은 하루를 죄다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만들어졌던 거죠. 그래서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역도선수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 서울컵 역도 선수권 대회에 나가서 마이너스 60kg체급으로 뛰었는데 135kg을 들어서 1등을 했죠. 역도는 3년 반 정도 했는데 성적이 생각보다 좋았던 편이에요.

▲ 아마도 운동 신경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 운동이 그냥 좋아서 무작정 많이 했어요. 좋아하니까 싫증이 안 나고 매일 하게 됐고요. 그러다보니까 경기력도 많이 올라가고 그러면 더 즐거워서 열심히 하게 되고 그랬던 거죠.

▲ 현재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 결혼을 2008년도에 했어요. 아내와는 2005년도 쯤 제가 사회복지사를 하던 때에 사회복지 관련 강의를 다니다가 스승과 제자 관계로 처음 만났어요. 사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더라고요. (웃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주의했는데도 마음이 어쩔 수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포함해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많이 생겼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볼수록 정이가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결혼을 늦게 하려고 했었어요. 아무래도 결혼을 하다보면 가정생활에도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좋으니까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실은 함께 유학을 떠났다가 중간에 한국에 들어와 결혼식을 부랴부랴 올리고 다시 뉴질랜드로 나가는 무리수까지 두게 됐죠. 그땐 결혼이 너무 빨리 하고 싶었나 봐요. (웃음)

▲ 결혼까지의 과정은 순조로운 편이었나요?

- 제가 결혼할 때 장인, 장모님께서 반대를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생각해도 장애인이 사위라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나 같아도 내 딸이 장애인을 만난다고 하면 싫을 것 같아요. 못생긴 여자를 데려오면 예쁜 애들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이런 여자애랑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더 나은 사위를 얻고 싶으셨을 것 같은데 반대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었어요. 그게 결혼할 때 제 첫째 조건이었거든요. 반대를 하시면 저보다는 저희 어머니 마음이 아프실까봐 그걸 가장 신경 썼어요. 그런데 장모님께서 너희가 좋으면 결혼해도 좋다고 흔쾌히 그러시더라고요. 굉장히 감사했죠.
우리 아내랑 결혼하면서도 제가 그렇게 말을 했어요. 내가 장애를 가져서 너에게 못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겠지만 장애를 가져서 더 잘해줄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으로 위안삼고 살자고요.

▲ 아이들에게는 어떤 아빠가 되고 싶나요?

- 지금 25개월, 4개월 된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어요. 전 장애인이 그냥 하나의 분류라고 생각해요. 연예인, 경찰, 군인처럼 남들이 쳐다보는 건 당연하다고요. 특별한 사람이잖아요. 연예인도 특별하니까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나요? 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직접 데려다주기도 하는데 선생님들이 어디 다치셨냐고 깜짝 놀라곤 하세요. 그러면 “저 장애인이에요.”라고 스스럼없이 말을 해요.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제 장애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이 크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면 그냥 저는 아이들에게 장애인 아빠로만 인식될 테니까요. 그게 제 과제라고 생각해요.

▲ 아이들하고는 주로 어떻게 지내나요?

-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요. 실내 놀이터 가서 같이 운동하고 놀아요. 제가 장애를 가졌지만 수영도 잘하고, 운동을 잘하는 편이어서 아이들과 공놀이도 하며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요. 애들이랑 제주도 해수욕장에도 잘 놀러 가고요.

   
 

▲ 킬리만자로 등반을 핸드워킹으로 한 이력도 있더라고요.

- 대학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어요. 국내산에 친구들과 가끔 기어서 가기도 했고, 매년 새해가 밝으면 북한산에 오르기도 해요. 험한 산에 오를 때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나, 너도 기어가고 나도 기어가기 때문에 평지에서보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해요. (웃음) 우연한 기회에 희망원정대와 함께 일을 하게 됐는데 그 때 갔던 거죠. 제 주례도 희망원정대에서 만난 엄홍길 대장님께서 해주셨어요.

▲ 엄홍길 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되었네요.

- 현재 엄홍길휴먼재단보다 희망원정대가 먼저 생겼었어요. 산행이라면 산 전문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해서 엄홍길 대장님을 모셔 와서 같이 일을 했던 거예요. 그 때 엄홍길 대장님과 인연을 맺게 됐고요, 관련 행사가 있으면 참석도 하면서 대장님 얼굴도 뵙고 그렇게 지내고 있죠.

▲ 킬리만자로 산이 정말 높잖아요. 얼마나 걸렸나요? 힘든 점도 많았겠어요.

- 15일 정도가 걸렸어요. 힘들기 보다는 정말 즐거웠어요. 다른 친구들도 많이 가고 우리나라산만 다니다가 외국산을 가보니 새롭고 좋더라고요. 그 당시에 우리 원정대의 등반 취지가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진 분들이 협동해서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신체부자유자 등이 다 함께 등반을 했어요. 사회에서 겪는 어려운 점들을 해소하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갔던 거죠. 장애인이 살다보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좌절하지 말고 이번 경험을 발판삼아 잘 헤쳐 나가자는 다짐을 다지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래도 위험했던 순간들은 기억이 나요. 한 명이 올라가던 도중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일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는 일이 속출했고요. 너무 고산지대다 보니까 같이 간 방송국 PD님 폐에 피가 차서 쓰러지고 그랬어요. 예비산행을 한국에서 많이 했지만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죠. 저 같은 경우는 두 다리를 못 쓰기 때문에 누군가 뒤에서 제 다리를 잡고 저는 핸드워킹으로 산에 올라야 하는데, 그러면 숨이 많이 차거든요. 그래서 올라가다가도 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그런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런 것이 좀 고생스럽긴 했어요.
또 한 방송국에서 우리의 산행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싶다고 촬영을 왔어요. 이 분들이 떠나기 전에 부모님들 영상을 찍어 와서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보여주더라고요. 그 당시 제가 어린 마음에 그랬는지 속이 좀 상했어요. 장애인들에게 왜 오기가 생기게 마지막에 저런 영상을 보여주나 싶었거든요. 정상은 절벽인데 무리해서 오르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그러나하는 마음에 화도 조금 났고요. 위험한 상황인 걸 뻔히 알면서 부추긴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국 정상은 밟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와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긴 했지만요.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 그 때 수기공모를 통해서 당선된 사람과 함께 올라갔거든요. 저는 스태프로도 참여했기 때문에 수기를 받아서 읽어보고, 면접보고, 상담하고 그런 일들도 했어요. 그 당시 산행 중에 커플이 생기기도 했는데 1기 때는 엄지공주로 유명한 윤선아씨가 참여해서 결혼까지 했고, 2기 때도 연상연하 커플이 생기기도 했어요. 산에서 싹튼 사랑이죠. (웃음) 장애 때문에 직장이 떨어진 사연, 나이가 많이 들어도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못하는 것으로 인해 오는 가족과의 갈등, 경제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는데 킬리만자로나 킬리만자로 등반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보는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우리 장애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요.

▲ 이야기를 쭉 듣다보니 문정훈 선수의 인생이 도전의 연속이네요. 지금은 역도를 하고 있는데 또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 일단 이번 브라질 올림픽에 집중해서 메달을 딴 이후에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긴 해요. 제주도청 소속 역도선수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역도에 취중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논문도 써야하고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대학원 생활에 많이 충실하지 못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미 금메달을 땄었기 때문에 큰 욕심이 없이 그냥 운동이 좋아서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 신인선수라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어요. 브라질에서 좋은 결실을 맺고 나면 다음에는 동계 올림픽 종목인 크로스 컨트리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 크로스 컨트리가 굉장히 어려운 종목으로 알고 있는데요, 문 선수에게 도전이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잘 산다는 의미에는 돈이 많다거나 명예를 갖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잘 산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느냐 아니냐가 가장 큰 것 같아요. 지금 제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데 그런 행복은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거잖아요. 그와 같이 인생에 있어서 즐거운 것들을 찾아서 하는 것들이 저에게 있어서는 도전의 의미가 있죠.

▲ 마음이 참 건강하고 밝으세요. 끝으로 운동선수로서의 최종 꿈이 있다면요?

-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두고 있어요. 학문적으로 지도를 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신체적인 면을 지도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골고루 준비를 잘 해야죠. 그러나 장애인만을 지도하고 싶지는 않아요. 비장애인들도 지도를 해보고 싶어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 지도를 많이 하잖아요. 장애인들의 특성을 모르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다른 방법들을 통해 나름대로 준비해서 잘 가르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최초로 비장애인을 지도하는 장애인이 되는 것, 그것도 프로팀에서. 그게 최종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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