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1960년대 이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일상어가 될 정도로 말이다.
‘보릿고개’란 전통적인 농업국가였던 한국이 겨울철이 지나 모내기를 할 봄철이 되면 겨우내 먹던 주식인 쌀이 떨어져 들녘 이른 봄에 피어난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낱알을 먹어야만 했던 열악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의 삶이 여기에 해당했다.

이른 봄철이면 아낙네들이 대나무 소쿠리를 옆에 끼고 아직 채 찬기운이 가시지 않은 온 들녘을 헤매며 쑥이며 소리장구 등 야생약초나 식용이 가능한 야생풀을 뜯으러 다녔다.

그것을 따다가는 멀건 죽을 만들어 온 식구가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쌀은 귀했고 보리나 옥수수 등을 한 움큼 큰 솥에 넣고 따온 이 야생초와 함께 끓여먹었다. 독초를 잘못 끊여 먹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일상이었다.
오죽하면 쌀밥에 고깃국 한번 먹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북한의 김일성이 북한을 공산화하는 과정에서 대중을 선동하면서 나온 구호가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여주겠다”는 구호였다.
대부분 “그러한 시절이 정말 올까?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슬픔 중 배고픈 슬픔이 가장 크다 하지 않았던가. 한국은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나라였다.

요즘은 살빼기 위해 먹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행복한 세상이 되었지만…

19세기 말 이른바 ‘서세동점’의 격랑 속에서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특히 ‘탈아입구(아시아를 넘어 유럽국가의 일원으로)’를 표방하고 대륙진출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은 한반도점령을 위한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시켰다.

조선조말 정치실세이던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변화하는 주변정세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금으로써 조선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재촉하게 된다.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미 간파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병탄하고 드디어 이완용 등 ‘을사오적’들의 발호 속에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 날을 국치일로 기억한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합병은 음흉한 제국패권주의의 용틀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그것은 곧 대륙진출을 위한 일본 제국주의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36년간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지배는 철저한 ‘조선의 식민지화’를 의미했다. ‘내선일체’를 앞세운 일본의 조선지배는 조선인들의 줄기차고도 지속적인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총검을 앞세운 ‘헌병통치’ 앞에 그것은 무력하기만 했다.

일본은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화한 후 철저하게 수탈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수탈은 조선의 경제를 거의 파탄으로 내몰았다.

조선인들만 소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던 쌀(미곡)의 공출로 굶주림과 가난에 찌들었던 조선인들은 더더욱 굶주리며 가난해졌고, 일부는 배고픔을 못 참아 간도나 연해주 등지로 탈출했다.

오늘날 상당수 동북3성 조선족들은 바로 이 때 조선을 탈출한 조선인들의 후예들이다.

조선을 식량기지화한 일본은 온갖 반인륜적인 악법을 통해 철저하게 조선인들을 통제했다.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은 검거되어 모진 고문 후 처형됐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내선일체’를 앞세워 조선인들의 성씨를 모두 일본식으로 개조토록 강제하고, ‘황국신민화’를 강요했다.

1931년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대륙 병탄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1941년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의 명분은 ‘대동아공영’이다. 이 기간 조선은 일본의 대륙침략과 태양전쟁 수행을 위한 식량조달기지로써, 병참기지로써 더더욱 수탈을 강요당했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한민족 모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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