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36년간 일본의 강압적인 폭압통치로 거의 한민족이 민족재기 회생불능의 상황에서 극도의 신음할 즈음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그것은 자력으로 되찾은 해방이 아닌 타력에 의한 해방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의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힘이 없었다.

1945년 조선의 해방은 그래서 또 다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의 시작이었다.

38선을 경계로 이북에는 공산주의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남에는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일제의 강압통치하에 희생된 조선인들만 자그마치 수백만명을 헤아렸다. 고문당해 죽고, 처형되어 죽고, 굶어 죽고, 전쟁에 끌려나가 죽고…

조선인들에게 해방은 바로 민족사의 멸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것은 노예와 같은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숱한 고난과 희생에도 불구 엄밀히 말래 당시 조선의 해방은 조선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2차대전 말 이른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주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타력에 의한 해방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오끼나와를 거쳐 일본본토 공격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미군이 희생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조기종전을 결심하게 된다.

아직까지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던 ‘원자폭탄(LITTLE BABY)’을 이 전쟁말미에 사용, 미군희생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킨다는 전략하에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한 발, 8월 9일 나가사키에 한 발 등 두발의 원자폭탄을 인류역사 최초로 투하했다. 그 결과는 정말 엄청났다. 순식간에 도시가 폐허로 변하였고 수십만의 인명이 희생됐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였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전선에서 비무장을 선언했다. 일본의 항복선언은 조선의 해방을 의미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조선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외쳤다. 그것은 한편의 드라마요 서사시였다.

그러나 해방의 흥분도 잠깐,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버리고 만다. 한반도 분단은 국토의 분단만이 아니라 민족의 분단을 낳았다.

물론 분단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혹자는 한국분단의 일차적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이다. 이들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 분단이 초래됐으며 이는 결국 미국의 책임이라는 논리다.

반면 구소련의 극동아시아지역 팽창정책 즉 공산화과정에서 파생된 역사적 산물이라는 시각이 있다.

즉 한반도 분단은 구소련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확산과정에서 불거진 구소련의 야욕이 불러온 파생물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은 이러한 구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군사분계선을 획정했고 결국 본의 아니게 한국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양측의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한반도 분단을 한반도를 둘러싼 외부적 요인에서 찾으려 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전 남북한은 이미 분단의 조건이 민족내부에서 생성되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독립군세력, 미국 등 해외에서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해방투쟁을 하던 구미파, 중국 상해 등 주요도시를 전전하며 대한독립을 꾀하던 임정세력 등 사분오열된 독립운동세력들에서 그 분단의 씨앗은 잉태되고 있었다.

조선인에게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외생적 이데올로기가 체내에 자리잡기도 전에 우리 민족지도자그룹 내부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고, 결국 이에 외세가 개입함으로써 구체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구대천지 원수지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당시 상황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당시 정치지도자 그룹의 선택이요, 노선이 아니랄 수 없다.

해방직후 김구, 조만식 등 조선의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일반민중들은 '해방=통일'이라는 인식을 가졌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현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것은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강대국 미소간의 냉전체제의 급속한 확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속성상 그것을 세계 공산화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함께 참전했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나머지 적어도 한반도를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정권을 수립하려했다.

당시 이승만은 이러한 국제역학관계의 미묘한 흐름을 간파하고 있었고 남북공동정권노선을 포기한 채 남한 단독정부수립전략을 견지 UN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를 통해 결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북한보다 먼저 수립했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8년 10월 8로군 소좌(소령)출신인 조선인김일성을 앞세워 단독정권 수립을 하게 된다.

38선은 사실 미국과 소련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38선을 기점으로 각각 분담한다는 취지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결국 한반도를 반영구적으로 가르는 경계선이 되고 말았다.

소련의 입장에서 북한 단독정권수립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전략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이 전략하에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북한군 현대화작업을 착착 진행시키게 된다.

북한정권은 이른바 ‘화차정부’였다. 즉 소련으로부터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 대부분을 원조받아 수립된 소련의 대리정권이었다.

‘화차정부’란 소련군(붉을 적자 적군이라고 함)이 점령지로 이동하면서 화물기차에 점령지에 필요한 모든 물적 인적물자를 싣고 들어와 친소괴뢰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북한의 전 정치과정에 소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실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김일성의 이른바 민족해방전쟁 구상의 실현여부는 철저히 소련의 비준과 동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련입장에서는 제2대전 직후 미국의 지원하에 설립된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 적화하겠다는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 구상에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것은 자칫 미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중국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상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 공산화과정에서 모텍동에게 상당한 군사적 지원을 함으로써 소련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잠재적 압박을 모택동에게 했다. 실제 김일성의 이른바 ‘민족해방전쟁’을 위한 비준요청을 받은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한국전쟁발발시 중국의 군사개입을 약속받고서야 김일성의 이른바 ‘민족해방전쟁’을 비준하기에 이른다.

그 명분이야 어떻든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결국 북한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치러진 동족간의 전쟁으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약 300만명의 인명이 살상됐다.

6.25는 소련과 중공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허황된 명분에 들뜬 한 30대초반 앳된 조선인 용병츨신 김일성의 형편없이 빈약한 역사인식과 개인적인 권력욕, 오판이 가져온 참 어처구니없고 비극적인 동족간의 살육전쟁이었다.

당시의 한국전쟁은 단순한 민족해방전쟁이 구조적으로 될 수 없었고 결국 제한적인 국제전양상을 띄고 진행되게 됐다.

한국전쟁당시 미국사령관 맥아더는 중국 만주 폭격을 미국정부수뇌부에 건의하게 된다.

당시 맥아더 장군의 중국 만주 폭격전략은 전쟁후반부 개입 20여만명의 병력을 지원한 중국에 대한 응징없이 전쟁이 종결되면 한반도는 또 다른 불씨를 안게 되며 더더구나 공산주의의 발호를 봉쇄하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군사정치적인 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확전주장은 당시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고 맥아더는 결국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태평양미군 사령관직에서 전격 해임되는 비운을 맡는다. 태평양 현지 사령관과 미국 백악관의 심각한 견해차로 그의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기고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어쨌든 중국 만주공격을 극구 만류한 투르만 대통령의 결정으로 한국전쟁은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게 되고 기나긴 한국전쟁은 종결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도 컸다.

남북한 모두 전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엄청난 인명의 살상으로 남북간에는 씻을 수 없는 적대감이 생겼다.

휴전 이후 지금까지 155마일 휴전선 일대에는 한국이 60만의 정규군을 북한은 110만의 정규군을 배치한 채 60년간 팽팽한 군사적 긴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휴전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북은 전한반도에 대한 공산화를 노동당규약에명기한채 단 한차례도 이를 수정하지 않고 있다. 과거 서울불바다공격위협에서부터 최근 핵공격 위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북한의 대남 강경노선의 뿌리는 이처럼 잘못된 한 정치지도자(김일성)의 허황된 국가적 목표제시에서 비롯됐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상처가 우리에게는 너무 크기 때문에 쉽게 과거는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오늘날 이른바 종북 좌파들의 친북적인 행동에 보수우파들이 거의 반사적으로 적대시하고 반응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내막이 뿌리깊게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그 좌와우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꼬…. 새로운 통합의 역사를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할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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