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5·16 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필자는 5·16 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권위가 있거나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최근 한국의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5·16 군사쿠데타를 시발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정책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제시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을 뿐이다.

5·16 에 대한 정보나 객관적인 시각은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탄생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고 가장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지켜보았던 미국의 입장에서 그 일단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글은 5·16 을 포함한 한국의 군사정부의 시작부터 그 전개과정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사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발간한 ‘Fraser Report’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필자주>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1961년 4월말 미국 정보당국에서는 박정희가 이끄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민국 군부 내의 주요그룹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인지했다. 체제전복의 명백한 위협이 존재한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당시 시민의 무질서도 없었고, 강화된 경찰력을 포함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었으므로 쿠데타 시도가 성공할 것 같지 않았다. 장면총리는 쿠데타가 있다는 소문을 과소평가했다.

5·16 쿠데타의 동기는 승진적체 등 처우불만에서 시작

1961년 5월 16일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5·16 쿠데타란 육군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 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을 말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

비록 쿠데타는 장도영 중장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장도영 중장은 군내부의 저항을 저지할 목적으로 쿠데타 참여가 강요되었음이 나중 밝혀졌다.

1961년 5월 17일 주한미군사령관/미8군사령관이 워싱톤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긴급전문에 의하면 장도영 중장은 유엔사령부에 쿠데타에 대항해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했고, 쿠데타군이 그의 명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위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거의 무혈에 가까운 5·16 군사쿠데타는 군의 일부 구성원들, 특히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곯았던 불만의 표출이었다.

그들은 특히 신속한 진급에 장애를 겪었던 점과 수많은 선배장교들의 부패와 파벌주의에 괴롭힘을 당해오던 터였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유엔군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워싱턴의 훈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다음의 공식성명을 통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 대장 맥그루더는 유엔군총사령관의 권한으로 요구한다. 휘하의 모든 한국군은 정식으로 인정된 국무총리 장면이 이끄는 정부를 지지해야한다. 대장 맥그루더는 한국군 장성들이 그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사용하여 통제권을 즉각 정부당국에 반환하고 군대의 질서를 회복시켜주길 기대한다.”

대리대사 마셜그린은 미 대사관을 대신한 성명에서 입헌정부(장면정부)에 대한 확고한 미국의 지지와 입장을 반복했다.

당시 장면정부는 대리대사 마셜그린, 정치자문관 도널드 레너드 공보관 그레고리 헨더슨 등 대사관의 핵심그룹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 그룹은 장면정부가 이승만정부보다 훨씬 민주적일뿐더러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1948년 여수반란사건 당시 박정희는 확실한 공산주의자였다. 이후 박정희는 재판을 받아 유죄가 입증되었고 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대략 300여명에 이르는 공산주의 요원들의 체포를 이끌어내는 정보를 제공했다는 명백한 이유로 형집행이 취소되었다. 박정희의 형량은 정일권과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61년 11월경 미국 정보기관은 박정희가 1940년대 잠시 공산주의운동에 몸담기는 했지만 더 이상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접촉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신 그를 군사정부의 지도자로서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만일 5·16 이후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의제민주정부를 회복하고, 한국군에 대한 유엔사령부의 작전통제권을 인정하며, 재정과 경제에서의 확실한 개혁도 달성한다면 미국정부는 그 실행에 도움이 되는 2800만달러을 지원하고 군사정부를 지원할 것임을 표명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미국의 입장에 대한 응답으로 1963년 5월까지 정부를 문민통제로 되돌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수천명의 수감자들을 석방했으며 장면정부 관리들에 대한 기소를 취하했다.

미국 국무부와 유엔사령부가 보인 5·16 쿠데타에 대한 초기 입장은 ‘적대감’이었다.

미국CIA가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 CIA는 이전의 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했으며 폭력적 계승자들을 혐오감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군사정부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1961년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변경했다. 장면을 포함한 2000명이상의 ‘부패’정치인을 체포하는데 채 6일이 걸리질 않았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약 1만7000명의 공무원과 40명의 군 장성을 포함한 2000면의 군장교들이 구금되었다.

쿠데타 발생 첫 일주일동안 주한미 대사관은 일반대중들의 태도가 쿠데타와 군사정부에 대해 냉담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이라고 보고 했다. 쿠데타가 발생한지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미국대사관은 비록농민들의 태도는 우호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도시 대중들은 ‘의심과 불안감’이 펴져있다고 기록했다.

박정희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61년 11월 14일 공동의 이익과 유대관계를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케네디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을 박정희는 민정이양에 대한 의지를 확인했다.

군사정부는 출범 때부터 경제개발에 대한 공약을 발표했다.

정부의 경제개발위원회는 장면정부에서 이루어진 작업에 기초하여 첫 번째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정부가 경제개발에서 주요한 역할을 천명한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연평균 7.1%의 고도성장이 예상되었다.

그 기간 동안 투자는 51%가 증가되고 수출도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회복지부문은 전혀 강조되질 않았다.

계획안에는 향후 10년간 정부가 추구하려는 경제정책이 반영되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된 박정희입장에서는 그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경제개발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략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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