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역사학자 이희진이 신랄하게 까는 대학사회의 문제점

   
 
학사·석사·박사가 모두 한 단계씩 떨어진 수준
대학이라는 흡혈귀에 대한민국 모두가 피 빨려
패거리 정치에는 또 다른 정치로 맞붙어야
학생들에겐 필요한 교육 시켜 사회에서 필요한 경쟁시켜야 해
 
【투데이신문 김두희 기자】과거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리던 대학. 2014년 대한민국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대학은 관심 있는 학문을 더욱 깊이 탐구하기 위한 곳이 아닌 남들이 들어가니까 나도 들어가야 하는 곳,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취업하기 위해 졸업장을 자격증처럼 따야하는 곳으로 변질됐다.
 
영어 유치원에서 시작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자율형사립고등학교까지, 해외 토픽감으로도 다뤄지는 대한민국의 엄청난 교육열도 모두 내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생겨났다. 그리고 누구나 이렇게 좋은 대학에 가려고 아등바등하지만 다들 한 번씩 생각해봤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와 교육 구조는 문제가 있다고.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전국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것도 이 교육 구조를 개선해달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반영됐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 우리나라 대학을 한국 교육 문제의 근원으로 지적하며 신랄하게 평가하는 책을 써냈다. 이 책의 저자는 ‘SKY’ 중 한 곳을 졸업했고 또 누구나 들으면 명문대라고 말하는 곳에서 역사학 중 가장 험악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는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라면 출신대학 이름값의 혜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대학을 해부한다는 책을 썼다는데, 얼마나 신랄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지 궁금증이 일었다.
 
마른장마로 비가 유난히 오지 않는다고 난리더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던 22일, <투데이신문>은 중구 소공동에서 이희진 작가를 만났다.
 
『흡혈귀가 지배하는 세상 대학』 책 제목이 특이하다. 대학사회를 ‘흡혈귀’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인가
- 흡혈귀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대학사회의 핵심 구성원들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의 피만 빨아먹는 게 아니라 최면도 잘 걸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예를 들어 최근 교육부장관 청문회의 경우, 그 사람이 논문을 표절했다는 것과 학생들을 시켜서 칼럼을 대필하게 했다는 게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정치인들이 지적하는 것만 보여줬다. 그런 식으로 여태까지 대학사회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줬고 또 그 사람이 길러낸 선생 중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몇 명이며, 그렇게 해도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교수 자리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한 마디로 관중들이 없는 야구 경기를, 그것도 편집된 경기 화면만 보여주고 스코어만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게임을 하니까 조작이 가능한 거다. 그나마 야구는 재미를 위해서 보는 거지만 사실 교육, 대학은 생존이 걸린 문제 아닌가. 대학 때문에 빚지고 그렇게 나온 학생들이 실업자 되는 것 아니냐. 이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건데 흡혈귀들이 거는 최면에 걸려서 본질은 못 보고 이 사람들 원하는 대로 계속 끌려 다니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대학원(석·박사)과 학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그렇다면 학사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대학사회의 핵심은 ‘교수’다. 그리고 교수의 활동은 아무래도 학회와 논문에 치중이 되기에 책의 주된 내용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학사논문의 경우 현재 대학사회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리포트 수준밖에 안 되고, 좀 심하게 말하면 학부교육이라는 것은 포기상태로 봐도 되는 것 아닌가 싶다. 대학을 졸업해도 리포트를 제대로 못 쓰지 않나.
기업이나 연구소, 사회에서 요즘 대학생들에게 가지는 불만이 가장 기본적으로 읽기·쓰기·말하기·듣기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초등학생 수준으로 책을 읽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읽고 있는 글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하는 건데. 그런데 멋대로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게 버릇이 되어있다. 대학에서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학부는 아예 글 쓰는 능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고 석사는 학부 수준, 박사는 석사 수준이 되는 정도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대학에서 이런 교육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 사회에서 뭘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책에 써놓은 것처럼 신입사원이 무섭다고, 겁나는 대졸자들이라고 한다. 할 줄 아는 게 없고 시킨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 사고 치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겁나는 대졸자들이라는 말이 인상깊다. 나름 대학까지 졸업한 고등교육자들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 대학에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동생이 전자공학 석사까지 밟았다. 그런데 동생은 이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굉장히 실망했다고 하더라. 자기는 어학을 못해서 공대를 간 건데 토플 시험을 봐야하고 실험을 제대로 안 한다고 했다. 이공계는 수식이나 기호로 다 알아볼 수 있고 그것을 보면 이해를 할 수 있는 건데, 영어로 이해할 필요성이 적은데도 어학 공부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대학에서 심도 있는 지식을 못 가르치게 되면 대기업에 취업한다고 해도 5년이면 수명이 다 끝난다고 하더라. 석사로 취업해도 거의 기능공 역할밖에 못한다고 하니…
또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 심지어 학생들이 갖추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다르다. 학생들이 취업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흔히 말하는 스펙, 어학능력, 자격증은 사실 사회에서 큰 관심이 없다. 어차피 갖춰봤자 다들 비슷하니까. 그러나 리더십은 굉장히 중점적으로 본다. 조직에 들어가서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고 또 승진을 하면 부하직원들을 이끌면서도 상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나.
그래서 리더십 교육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대학에서 가르치는데 군인들을 데려다가 가르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노릇이냐. 대학에서 교육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경직돼있으면 학생들이 바보가 되는 것이다. 평등한 관계에서 나를 따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이끌어나가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리더십인데 그런 것에 대해 현재 대학 교육에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위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의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지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내가 제공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는 상태다.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뭐가 필요한 것인지 이런 것에 관심을 가져야 맞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어긋난 대학사회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대학사회를 망친 심각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교수’가 인기 직업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볼 수 있으니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미국 대학의 경쟁력은 세계적으로 알아주지만 미국에서 ‘교수’는 인기 직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굉장한 노력을 계속 요구하는데다가 기득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교수 한 번 되면 아무리 개판을 쳐도 평생 편하게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놀고먹을 수 있는 보장이 없다.
아까 말했던 교육부장관 청문회에서 본 것처럼 신문 칼럼도 학생들 시켜서 채우면 되는 나라다.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강탈해서 본인이 해야 하는 논문이나 칼럼을 냈다는 것이다. 그런 강탈로 얻은 재산을 다 박탈해야 되는 것 아닌가? 업적을 조작하고 칼럼을 대필하고… 학자로서는 도저히 용납 받을 수 없고 학문적으로는 사형감이다. 그런데 이런 사형감이 될 행동을 대한민국 교수들은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는 것을 공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철저히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라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대학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미 현실에 순응한 시간강사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박봉을 받지만 훗날 전임 교수를 목표로 하면서 악착같이 버티는 시간강사도 상당 부분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 전임 교수를 코앞에 둔 사람들이 총 몇 퍼센트라고 보시는가.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은 매해 수십 명씩 나온다. 그런데 정말 일부를 위해서 90%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이다. 차라리 중국의 경우에는 하나의 과에 교수를 20~30명씩 둔다. 왜 그렇게 많이 둘 수 있을까? 혜택이 우리나라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우만 따진다면 우리나라의 시간강사와 다를 것이 없다. 계약제이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끼리 경쟁할 수 있고 또 능력 있는 교수들을 쓰면서 대학끼리도 경쟁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혜택보다는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고 이 일을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교수 자리를 줘야지, 월급 많이 주고 일이 적고 평생 기득권을 누릴 수 있어 교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교수 자리를 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제도는 결국 기득권을 누리려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고 또 그런 사람이 교수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또 그런 교수들은 학생들이 납득할 수 없는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 결국 학생들은 부실한 교육을 강요받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대학 다닌 사람들이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졸업을 하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불만을 내뱉던 학생들도 결국 자기가 기득권을 잡으면 기존 기득권층과 똑같이 행동하게 되는 사회가 우리나라다. 
 
   
 
교수들이 모이는 학회들을 패거리라고 칭하면서 이들의 갈등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가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나? 또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과 ‘패거리’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으신 것인가
- 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술자리처럼 편한 자리에서 하는 말과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다. 만약 이 사회에서 붙어먹고 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면 가능할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에서 미련을 못 버린다.
역사과에서는 ‘강단사학’이라는 말을 하는데, 제도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기득권층의 영향에서 벗어날 확률이 굉장히 낮다. 물론 모두가 1%를 제외한 99%가 실패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한 번 교수가 됐다고 하면 그야말로 탄탄대로에 천국을 보장받는다는 것을 아니까 마약처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살기 위해 99명이 희생되는 제도에 목을 맨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단결은 바랄 수가 없다.
물론 진보적인 역사학회도 있다. 처음에는 이곳이 굉장히 저항적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일부가 교수가 되고 주요 인사들이 교수가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결국 ‘교수’ 위주로 돌아가게 되더라.
 
역사학 전공자이신데 ‘역사과목을 강요하는 솔직한 목적’ 부분에서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가르쳐 왔던 이유가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 만약 누군가 역사학이 사회에 필요하냐는 묻는다면 대부분이 ‘YES’라고 할 것이다. 필요하지 않았다면 학생들이 지금까지 배웠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역사학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야기와 그래서 역사교육이 사회에서 필요한 방향으로 교육을 시키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물론 역사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역사학의 순기능에 대해서 필요성이 있고 그래서 가르쳐야한다는 것이겠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 역사학을 필수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런 의도로 역사학을 필수로 만들고 강화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올 초 박근혜 정권 들어서면서 한국사 과목이 필수가 되고 그 후 바로 역사 교과서 파동 난 게 그것을 증명해준다. 역사적 경험이나 교훈을 조작하면 어떻게 되나, 어느 한 쪽이 유리하게 세상은 이렇게 가야한다고 끌고 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교육과 교과서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 옳고 그르다고 피 튀기면서 싸운다. 싸우는 쪽들은 교과서 내용을 정확하게 쓰는 것보다는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학문을 팔아먹는 것이지, 원론적인 교육의 활용을 위해 하는 쪽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요즘 해피아, 관피아, 모피아 등 어떠한 분야에 해를 끼치는 무리를 이탈리아의 범죄조직 마피아에 빗대 설명하고 있다. 그럼 ‘학피아’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대학사회가 심각한 수준인가
- 그렇다. 어떻게 보면 학피아는 표시가 안 나서 그렇지 가장 문제의 근원일 수도 있다. 다른 분야들도 이렇게 가르쳐서 내보내는 것이니까. 이번 교육부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한 후보가 학생들을 시켜서 본인의 업적을 채우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그런데 그 후보, 교원대 교수다. 교원대 교수가 학생을 착취해서 업적을 채우면 그 행동을 보고 선생이 된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나. 그렇게 안 하려면 극단적인 반대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항한다면서 전교조를 만든 것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잡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정치적인 ‘패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것대로 비극이다.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이겠냐. ‘패거리’를 짓는 정치가 아니면 해결이 안 되게 만들어놓고 ‘패거리’ 만들었다고 욕을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결국 한국 사회가 정치를 권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패거리를 지어 싸우는 정치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하고 또 이 기준으로 공정하게 검증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학은 공부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만 하는 곳이 돼버렸다. 또 교육부에서도 대학의 성과 기준 중 하나를 ‘취업률’로 두기도 하면서 ‘부실대학’을 지정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학생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하라고 교육부에서 대학에게 시킬 필요가 없다.  만약 어느 한 대학에서 키워낸 인재가 정말 필요한 인재라면 취업을 시켜라 마라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나. 그래서 교육부에서는 진짜 필요한 인재를 만들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진짜 필요한 인재는 수치로 나오지도 않는다. 교육부에서 이러한 것을 성과 기준으로 두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프로야구의 경우 실력 있는 선수를 써라 쓰지 마라하고 선수를 몇 명 취업시키라고 하던가? 구단끼리 경쟁이 치열하니까 실력 있는 선수를 쓰지 않으면 성적으로 바로 증명이 된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그런 선수를 뽑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것 아니겠나.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해서 실력을 갖춰야 하니 또 스스로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프로야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근본적인 동력 아닌가.
사회에서는 프로야구계처럼 극단적으로 경쟁시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사회에서 필요한, 제대로 된 경쟁을 시켜야하는 것이다.
 
대학 강의 평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기존 강의 평가의 기준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는데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 앞서 이야기한 교육부의 규제와 직결되어있다. 만약 학생들 스스로 자기가 필요한 교육을 시켜 줄 선생을 고르기 위해 강의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강화되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기존의 강의 평가들은 기득권층을 위해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일반적으로 전임교수들은 강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힘없는 시간강사들이나 교양 교수들은 강의 평가를 받는다. 거기서 벌써 힘없는 사람들만 몰아내는 꼴이니 불공정한 평가가 된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학생들을 위한 강의 평가냐는 것이다.
강의 평가 기준 중에 하나는 ‘강의가 정해진 진도대로 나갔는가’이다. 그런데 실제로 대학 강의의 경우 진도표대로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한국사개설’이라는 수업은 적어도 단군부터 해방까지는 다뤄야하는데 16주 동안, 1주일에 3시간씩 아무리 강의를 많이 한다고 해도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뺀 14주 강의에서 모두 진행할 수가 없다. 그러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만큼의 이야기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고등학교 교과과정보다 못한 이야기를 14주 안에 억지로 때려 넣는 것이고 결국 이러한 진도표대로 나가는 건 대학 교육을 하는 의미가 없다.
교육부가 말하는 관료들의 지침은 교육 현장에서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지침으로 해놓고 그 지침을 기준으로 평가를 하라는 것이다. 관료들이 편하려고 정해놓은 이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학생들을 위한 평가가 되겠는가?
학생들이 필요한 교육을 받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두고 강의 평가 기준을 정해야 한다. 기존처럼 전형적인 관료적 발상으로는 현장에서 맞출 수도 없고, 또 이것을 강의 잘한 것으로 평가하라는 것이 과연 현실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정부를 비롯한 사회에서 대학을 위한 투자를 좀 더 늘리는 것은 어떨까
- 지금 우리나라 대학사회에 투자를 하면 할수록 부작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바로 일반적인 상식의 맹점을 지식층들이 이용한 것이다. 투자는 어떠한 부분을 발전시키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어떠한 분야에 투자를 했다면 결과적으로 투자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연구비 받은 만큼 내놓아야한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은 투자금을 받고 결과를 날림으로 만들어 놓아도 전혀 제재 받지 않는다. 이에 대해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면 심사해서 통과시키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또 심사가 제대로 된다는 보장은 있는지 궁금하다.
황우석 박사의 경우도 그렇다. 적어도 언론에 보도된 것이 사실이라면 거기는 몇 천억 원이 투자됐다. 그런데 그 돈이 제대로 연구할 사람에게 갔다면 결과가 무엇이라도 나왔을 것이다. 물론 황 박사도 일부 성과가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항상 비용 대비 효율이 문제가 된다. 몇 천억 원을 투입했는데 그에 걸맞은 성과가 나왔냐는 것이다. 만약 결과를 속이는 데 천억 원, 몇 천억 원을 사용한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날림으로 하는 것을 국가가 권장하게 되는 꼴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에서 R&D 예산이 적다고 난리지만 그런 식으로 예산을 투입한다고 해서 제대로 발전되겠나.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다. 차라리 아무 예산도 안 주면 하고 싶은 사람이 하기라도 하지.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거의 파산상태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만약 파산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누가 책임지나?
 
현재 우리나라 대학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말씀해주신다면
-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끼리 싸움을 붙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바로 그것을 못 시키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진짜 책임지고 싸움을 해야 할 때는 도망가고 책임을 지지 않는 온라인에서는 근거 없는 비방을 하면서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이 이런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송에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도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본질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 정도 부담을 가진 검증 장치를 많이 만들어야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헛소리를 막을 수 있다. 그게 안 되니까 괜히 온라인에서 패거리를 지어서 특정한 사람을 매도하려고 쓸데없는 힘을 쓴다.

2014년 우리나라의 교육 실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 책의 제목 그대로다. 흡혈귀가 지배하는 세상. 대학사회라는 흡혈귀에게 대한민국이 피 빨리고 최면에 걸리는 지금에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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