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삼국지인물전>, <역사, 어제이면서 오늘이다> 외 4권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몇 년 전 우리 집에서 반상회가 열렸다. 처음으로 이사 온 집에서 반상회를 하는 게 이 아파트의 전통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반상회엔 아주머니들이 다수 참여하다 보니, 남자인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듣기만 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온 경비 있잖아. 어떻게 생각해? 현관 근처에서 담배나 피우고 일을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이 아파트에 오래 산 아주머니였다. 반장이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건 좀 그런데…….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저씨 인상도 좋고…….”

나는 흡연자라서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뜨끔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가관이었다. 반장의 미지근한 대답에 기분이 나빴는지 그 아주머리는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인사도 안 하고, 짐을 들고 와도 들어주지도 않아. 뭐 그런 경비가 다 있어? 싸가지 없이. 그 XX 잘라야 돼!”

경비원을 ‘경비’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태도, 경비원이 종도 아닌데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을 ‘싸가지 없다’고 단정하며 잘라야 한다고 욕을 하는 걸 보며, 울컥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사 온 첫날부터 언성을 높이고 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반장이 그 아줌마를 달래기 시작했다.

“제가 경비아저씨한테 알아듣게 이야기를 할게요. 여기 온 지 며칠도 안 됐는데 어떻게 자르라고 해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안 돼! 그 XX 잘라야 돼. 우리 돈 내고 경비 쓰면서 왜 참아야 돼?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당장 경비 바꿔달라고 해.”

끝내 ‘그 XX’는 잘리고 경비원이 교체되었다. 아내와 나는 안타까웠지만, 분을 삭이고 말았다.

경비원을 홀대하는 건 우리 아파트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흔히 있는 일일 것이라 짐작한다. 경비원은 아파트 주민의 노예가 아니고, 정해진 급여를 받으며 근무를 하는, 주민과 동등한 관계를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얼마 전 주민의 인격모독에 항의하며 분신시도를 했던 강남 압구정동의 모 아파트 경비원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도 여전히 경비원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주민들이 많을 것이다. 주민이 무슨 벼슬도 아니면서 왜 경비원한테 인사를 받아야 하나. 인사는 서로 하는 것이다. 짐이 많으면 ‘들어 달라’고 부탁을 할 것이지 왜 경비원이 알아서 들어주기를 바라는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경비원 일을 하는 게 죄라서, 자칫하면 잘릴 지도 몰라서 우리나라의 경비원 아저씨들은 주민들한테 폭언을 들어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도 참을 수밖에 없다. 경비원이 없으면 짐 하나도 못 들고, 쓰레기 하나 제대로 못 버리는 주민들은 경비원한테 고마운 마음을 지녀야 마땅함에도 ‘우리 돈 내고 고용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과연 경비원을 노예처럼 생각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우리 돈’을 내기나 하면서 저런 저급한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지위를 이용해 낮은 사람을 억누르고 무시한다. 그러니 국회의원 따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한테 눈알을 부라리고, 상급자가 하급자를 억누르며, 나이를 벼슬 삼아 연소자를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나 역시 한 때 비정규직 연구교수 생활을 하면서 모멸감을 느낀 적이 있다. 근무하는 연구소의 회계통장 관리 문제로 학교 재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연구소 설립을 하면서 회계문제를 학교 측과 합의하여 투명하게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재무과 직원은 마치 내가 학교의 규정을 무시하고 음성적으로 돈을 관리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몰고 갔다.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을 해 줘도 막무가내로 우겨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학과의 전임교수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런 저런 경위를 거쳐 회계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교수가 다 설명을 해 드렸는데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전화 드렸습니다.”

같은 말을 했는데 내가 할 때는 고압적으로 나오던 사람이 ‘무슨 과 교수 아무개입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순한 양으로 돌변했다. 전임교수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일이 쉽게 해결되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아무 말을 못하고 앉아 있는데 교수님이 한 마디 했다.

“휴우, 이러면 안 되는데. 쟤들은 비정규직을 직원으로 인정을 안 하는 거야.”

이 일화를 소개하는 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경비원’이나 있어 보이는 ‘교수’ 역시 모두 권위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듯 권위주의는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곳에 암처럼 뿌리박혀 있다. 다만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나마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글이라도 쓴다. 덜 억울하기 때문이다. 중상을 입은 모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의 빠른 쾌유를 빈다. 아울러 권위주의에 찌들어 약자를 괴롭히면서도 그 잘못을 모르고 있을 수많은 ‘갑’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그 사람도 인간이다’가 아닌 ‘그 사람은 인간이다’라는 생각을 지녀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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