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며칠 전, 뉴스에서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하려던 여자의 혀를 물어뜯었던 남자에 관한 보도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자체가 참 이채로운 일이다. 성추행이라고 하면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적으로 약한 여자가 아름답지도 않은 남자에게 성추행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보일 테니 뉴스거리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른 측면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바로 사건의 처리 결과이다. 보도된 바로는 처벌은 남자 쪽이 받았다. 술에 취한 상태라고는 해도, 덩치 큰 남자가 ‘연약한여자’에게 상해를 입힌 것을 과잉방어라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사소한 도발을 빌미로 과잉대처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 자체를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집행유예 정도로 끝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판결을 결과를 놓고 보면 뭔가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우기 어렵다. 여자가 같은 상황에 처해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어찌되었을까? 자기를 성추행하려는 남자 혀를 짤랐다는 정도를 상해로 치려는 지도 의문이고, 이 사건의 가해자는 당연히 성추행을 시도한 남자라고 여길 것이다. 더 나아가 성범죄를 시도한 남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약하다며 난리를 치는 게 요즘 풍조다.

이렇게 놓고 보면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반응을 보여도, 여자는 무조건 피해자 남자는 무조건 가해자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남자는 여자에게 싫은 애정 강요받더라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까다로운 대응수준을 의식해가며 반응해야 한다. 물론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계산 제대로 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그냥 당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논리는 여자에게 과잉방어 이야기가 나올 때에도 어김없이 나왔던 것이다.

이는 같은 문제라도 성별에 따라 노골적으로 이중 잣대를 들이대겠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별 문제에서 만큼은 차이를 인정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버린다. 그럼 ‘법 앞에 평등’이라는 명제는 어찌되는 걸까? 이럴 수밖에 없다면 뭐 하러 ‘양성평등’을 내세우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남녀에는 차이가 있으니, 남자건 여자건 상황에 따라 차별을 감수하라고 나와야 일관성이 유지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이보다 더 황당하면서도 겁나는 역차별 법도 있다. 최근 공기관을 위주로 교육시키는 성희롱 기준을 보면 남자가 강제 키스에 저항하다 가해자가 된 정도는 문제도 안 될 것 같다. 악의 없는 덕담, 무심코 이루어진 접촉까지, 심지어 쳐다보기만 해도 여자 쪽에서 기분 나빴다고 여기면 무조건 성희롱으로 처벌 받아야 한단다. 이런 법을 글자 그대로 시행한다면 사회적으로 살아남을 남자가 몇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이런 점을 악용하면 여자들은 적당히 도발해서 성희롱에 걸릴만한 행동을 유발시킨 다음 이를 이용하여 상대 남자를 매장시켜 버리기 쉬워질 것이다.

혹자는 그동안 여자들이 사회적 약자로 피해를 보아왔으니, 이 정도 벌충을 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법 적용은 여자를 핍박해 본 적도 없는 애꿎은 남자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한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애써 외면하겠다는 태도 역시 대한민국 사회에 달가운 일은 아니다.

사실 이런 사태가 축적되면 부작용은 훨씬 심각해 질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능력 있는 인재들이 모여 격의 없이 협력해야 할 일이 많다. 물론 이럴 때 남녀를 가릴 여유 같은 것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여자와 말이라도 잘못 섞었다가 피해본다는 피해의식이 심해진다면? 여자와 협력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도 생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던 선배 교수의 여학생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 돌려주려다가 난데없이 스토커 취급을 받은 것이다. 현행법이 떠오르면서 겁이 덜컥 났고, 이후에는 그 여학생과는 몇 년 째 마주쳐도 말도 건제지 않는다. 본디 좀 소심한 성격인 데다가, 표절·재탕·연구비 횡령으로도 잘라낼 수 없는 교수 자리를 성범죄로는 자를 수 있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낀 선배가 민망할 일이 생겨도 아랑곳하지 못한다. 당사자에 관한 한, 서로 협력해야 할 연구자라는 개념은 지워버린 지 오래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관계를 자연스럽게 서로 경계하고 대립하게 만드는 일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런 태도 보이지 않는 여성동지와의 협력이 가능하다. 실제로 서로 협력을 모색하고 있고, 결실을 거두어 공저로 저서를 낸 일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만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여도, 여자는 극단적으로 기피하게 되는 증상을 치료(?)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바람직하지도 않으면서 악용하기 쉬운 법 조항이 생겨날까? 이런 법 만든다고 특정 성별 전체가 특별한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성희롱 법 아무리 강화해봐야 진짜 악질적인 자가 처벌 받는 꼴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과 돈 있으면, 아무리 나쁜 짓 하더라도 빠져나가는 꼴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결국 강화된 법으로 걸려드는 쪽은 권력도 돈도 없는데다가 세상 물정도 모르는 쪽이기 십상이다.

그럼 혜택은 누가 볼까? 악용하기 쉬운 법을 만드는 이유는 뻔하다. 이것을 이용해서 평소 걸림돌이라고 여겨졌던 상대를 제거하는 수법 역시 고전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법을 악용해서 이익을 챙기는데 익숙하지 못하니까. 이런 짓은 어떤 형태로던 권력에 민감한 정치꾼의 몫이다. 그러면 악용하기 쉬운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더 이상의 해설이 필요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걸리면 남녀는 물론이고 부모·자식까지 몰라보는 게 현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과 규범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특정 성별 보호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부처가 있다. 물론 지구촌 다른 나라에는 없는 부처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부처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특별히 이런 부처를 만들어 맡아야 할 업무’가 없기 때문이란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런 부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있어야 할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도 특정 성별에 기대서 명분을 만들려면 눈에 확 띌 만큼 유리한 법조항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발상에서 만들어진 법을 악용한 부작용은 대개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런데도 이런 법이 만들어져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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