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지난 14일 서울 교육대학에서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학연구센터 공동주최로 ‘아시아 사회과교육의 동향’이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제목만 얼핏 보기에는 아시아 지역의 사회과교육의 동향을 파악하고 더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려는 학술대회로 보인다. 대부분의 발표주제가 대만이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사회과교육 동향과 국내사회과 과목 관련 내용이었으니, 무난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주제가 다른 발표와는 달리 무난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최근 있었던 보도와 관련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얼마 전, 앞으로 나올 모든 교과서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나라’라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라 한다. 이런 조치가 나온 것은 ‘자유민주주의 부정은 곧 종북’이라고 했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 권희영 교수 등의 주장이 관철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유일하게 이채로웠던 발표도 바로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는 권희영 교수의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교과서에 들어가도 좋은 것일까? 권희영 교수 등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 사용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마치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인 것처럼 몰아왔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를 비롯해서 전문가 집단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 사용을 비판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알고 보면 유신 독재 시절에도 정부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웠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정부가 정말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신헌법을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물론 ‘인민민주주의’내세웠던 북한도 별로 다를 것 없고.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보면 ‘자유민주주의’던 ‘인민민주주의’던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점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민주주의’ 앞에 어떤 수사를 붙였건, 실행이 중요한 것이지 용어 자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수사적 민주주의’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고 보면, 앞에 무엇을 붙이느냐는 두고 천박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 자체가 군중에게 권력을 주는 하나의 체제일 뿐이지, 이 자체가 무슨 절대 선(善)이라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이러니, 이 앞에 무슨 말을 붙이건 정의나 선이라는 측면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이런 용어를 만들어내 놓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략하는 행각을 뒤집어 보면, 수사적 민주주의에 집착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다른 세력은 민주주의를 왜곡시키고 있고, 자기들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시켜 정의와 선을 이루어낼 수 있는 집단이니 권력 내놓으라는 생떼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의미 없는 용어에 집착하는 꼴은 ‘자기들이 내세운 명분 팔아 권력 얻으려는 수작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말 뒤에 숨어 사리사욕 채우는 것 역시 천박한 정치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천박한 정치꾼 집단이 이런 속셈을 가지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만들어낸 용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까?

그런데도 권희영 교수 같은 이들의 활약(?)에 의해 이런 용어가 실제로 교과서에 삽입될 모양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데도 뭐가 못 미더웠는지, 권희영 교수는 학술대회에 이러한 내용을 또 발표했다. 이왕 발표할 거라면 좀 성의 있게 해야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힘이 될 것인데, 이번 발표는 날림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딸랑 3쪽짜리 발표문에, 지금까지의 주장을 요약해 내놓은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더구나 이날 학술대회는 권희영 교수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학연구센터의 후원을 받은 것이다. 즉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학술대회라는 얘기다. 이런 데에서 성의 없는 재탕 발표하면서, 수당 챙기고 천박한 정치논리를 홍보한 셈이다. 학문윤리가 살아 있는 나라라면 이렇게 성의 없는 재탕 발표 자체가 교수로서의 수명을 끊어 놓아야 할 이유가 되겠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무리를 감수하고 발표를 강행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의지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사태를 보아야 하는 국민의 입장은 뭐가 될까? ‘자유민주주의’ 같은 천박한 구호가 교과서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세금 들어가는 학술대회에 이런 발표가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세금 몇 푼이 낭비되었다는 투정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지난 주말 있었던 학회에서 대한민국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었다는 사례가 거론됐다.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악법도 법이다’ 는 말을 창작해 낸 것, 둑이 터지는 것을 자기 몸을 바쳐 막아냈다는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 만들어 낸 것 등. 한국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소년의 이야기의 본고장을 찾아 헤매는 바람에, 당사국인 네덜란드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소년의 동상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국제적 망신도, 교과서가 권희영 교수 같은 이들의 장난에 놀아나는 일에 비하면 한낱 웃고 말아버릴 수 있는 개그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듣자하니 ‘자유민주주의’ 뿐 아니라 유관순도 곧 모든 교과서에 수록된다고 한다. 동료 연구자들 모략하려고 만들어냈던 권희영 교수의 활약이 또 하나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반박을, 언론사를 통해 권희영 교수에게 보내고, 서로 책임지는 논쟁을 통해 결론을 내자고 했지만 권 교수는 거부했다. 동료 연구자들을 매장시킬 수도 있는 주장을 했으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책임지고 시비를 가리자는 논쟁에 도망갔으니, 자신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서도 동료 연구자를 종북 세력인 것처럼 모략했던 행각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처신해도 그의 주장은 교과서에 반영된다.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료들을 모략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내용들이 우리 아이들의 머리 속에 교육을 팔아 구겨 넣어지게 된다는 얘기다. 이런 사태가 권력에 미친 교수 몇몇에 의해 우연히 벌어진 것일 수는 없다. 동료 연구자들에 대해 파렴치한 용공조작과 모략을 되풀이 하고 있음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그에게 한국학대학원장이라는 중책을 계속 맡기고 있다. 용공조작에나 몰두하는 사람에게 학자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지위를 유지시켜주는 것 자체가 앞으로도 악질적인 선동을 하라고 힘을 실어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던 청와대이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권희영 교수 같은 이들의 행각 뒤에는 권력의 비호가 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비극은, 권력을 잡고 있는 집단이 자신들의 의도를 충실히 수행하는 앞잡이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이런 교과서를 두고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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