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 현실과 미래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원칙적인 이유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역사는 소수 사람의 사리사욕을 위해 경험과 교훈을 조작해 내는 일이 많다. 그리고 그렇게 조작된 경험과 교훈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굳어져 버린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징비록’은 이런 측면에서 참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배경이 된 임진왜란 자체가 우리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니, 드라마나 영화 같은 콘텐츠에서 반복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반복해서 만들어진 징비록 내지 임진왜란 관련 콘텐츠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이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수십 편의 징비록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저자 류성룡과 징비록의 가치에 대해서는 칭송 일색이다. 그런데 그래도 좋은 것일지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경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역사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세에 보여주어야 할 교훈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위기에 닥쳐올 때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임진왜란만큼 많은 교훈을 던져줄 사건도 많지 않다. 그래서 주목되는 것이, 이른바 조선통신사들이 엇갈린 보고로 전쟁에 혼선을 빚었던 사실과 이에 대한 인식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쟁의 기미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인물 중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해오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보고를 해서 혼선을 초래했다. 이를 두고 예나 지금이나, 혼란을 우려한 고육책이라고 해석해주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이유는 ‘인심이 동요할까 봐’였다. 그렇지만 납득이 가는 변명 같지는 않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최고 결정권자인 왕과 정사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소리할 것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논의를 거친 다음 백성들에게 어떻게 알리느냐를 고민했어야 한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당시 피해를 보지 않은 현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실감날 만큼 피부에 와 닿는 가상 상황을 한번 설정해 보면 어떨까? 누군가 ‘곧 재정위기가 닥칠 것이니, 이를 막기 위해 복지 축소하고 공무원 숫자와 예산을 확 줄이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고 해보자.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그런 말을 꺼낸 사람을 매장시키려 들 테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일어날지 아닐지 모르는 재정위기보다,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혜택을 줄이자는 것이 더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라고 다를 것은 없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인정하게 되면, 전쟁 준비를 위해 많은 무리를 해야 하고 이는 기득권층이나 백성에게나 견디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특히 기득권층은 이미 누리고 있는 특혜 상당부분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사태가 초래될 주장을 달갑게 여길 리 없다.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 아예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몰아버리는 것이다. 더불어 위기가 온다고 주장한 사람을 매도해서 매장시켜 버리는 일은 세트메뉴다.

그러다 정말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당시에도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지만, 징비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인심이 동요할까봐 그랬다’라고 하면서 넘어갔다. 지금도 정말 인심의 동요로 인한 혼란을 우려해서 그랬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다. 상당히 유치한 수법 같지만, 현실에서 꽤 잘 통하는 고전적 수법이라는 점은 여러 차례 증명되었다. 이후에도 1997년의 외환위기 때처럼, 이런 명분을 위기에 대처 못한 핑계로 내세우고 넘어간 일은 흔하니까.

이런 문제에는 ‘역사의 심판’도 믿을만한 것은 못 된다. 어찌 보면 더 섬뜩한 측면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당시에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황윤길과 허성 등이 평가를 받아야 할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시 지식인들 상당수가 이들을 ‘비겁한 사람’으로 몰아부쳤다. 실제로 이들의 경고대로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도, 이들을 복권시켜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이들이 전쟁 위협을 경고하다가 매장 당했다는 점을 주목하지도 않는다. 전쟁을 경고했던 사람들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매도되고 있는 셈이다.

반면 김성일은 인심을 챙겼던 애국자이고, 일본에 가서도 기개를 떨친 인물로 묘사됐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지금까지도 대세를 이루며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현실이 어떤 교훈을 줄까? 앞으로 어떤 위기가 닥쳐 온다하더라도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대처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기득권층이 명백하게 다가온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 뻔히 보이는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기 싫다는 것, 그리고 알면서도 대처를 못할 만큼 그 사회에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럴 만큼 고비용 저효율 사회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득권층의 책임이다. 그런데도 험악한 사태를 경고한 사람은 매장되고, 초래한 당사자들을 대단한 위인으로 평가 받는 것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평가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의 대처를 평가하는 태도가, 바로 앞으로 닥쳐올 위기에 대한 기득권층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명제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한탄한다. 특히 불행한 역사일수록 그렇다. 그런데 누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한탄하는 바로 그들이 범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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