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노태우가 6.29선언이라는 극적인 정치이벤트를 통해 일약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을 대한민국 국가최고 지도자급 리더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임 전두환의 치밀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정말 전두환은 노태우를 ‘관리’했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은 당시 전두환의 언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980년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전두환은 당시 친구인 노태우 장군에게 “잘하면 내 다음에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언질을 준 바 있고 그 뒤 실제로 전두환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부 내 주요보직을 골고루 경험하게 함으로써 의식적으로 그를 ‘관리’했다.

결국 1987년 6월 2일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민정당 중진위원들을 초청한 만찬자리에서 전두환은 노태우 당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천거했고 이때 노태우는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노태우는 이날 건배제의를 통해 전두환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끝까지 모시고 중단없는 전진, 각하와 모든 영광 나누기를 다짐합니다”라는 '충성서약'을 하기까지 했다.

당시 전두환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일련의 사건과 과정을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노태우를 극적으로 차기 대한민국 국가최고지도자반열로 올려놓았던 ‘6.29 선언’은 고도로 조작된 정치이벤트였음이 분명하다.

노태우에게 평화적인 정권이양후 권좌에서 내려온 전두환은 1989년 12월 31일 국회증언에서 “6.29선언과 관련해 그 경위나 배경을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직답을 회피했고 정치이면의 이야기는 후일 회고록을 통해 밝히겠다고 말함으로써 미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5.6공의 과도기에 한참 전두환에 대한 책임론 여론이 들끓자 전두환 측 한 인사는 “6.29선언의 경위와 주체가 정확히 밝혀지면 노태우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있는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그 과정과 경위야 어찌되었던지간에 노태우는 전두환과 그 측근들에 의해 수립된 선거전략과 당시 이미 조성된 사회분위기에 잘 편승해 대통령 자리를 꿰찰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그의 전임 전두환에 의해 만들어졌고 당시 국민들은 이를 별 저항없이 사후추인했다.

그야말로 그때의 정치란 ‘힘 있는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시대’였고 대통령자리도 전임이 후임을 지명하였던 셈이다.

그저 국민들은 잘 연출된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에 불과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을 ‘직선제’를 통해 선출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이렇게 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노태우는 자신의 집권기간 중 적어도 전두환을 괴롭혔던 권력의 정통성문제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심경이었던 듯하다.

하기사 쟁쟁한 야당정치인들과 선거를 통해 당당히 겨뤄 대통령자리를 꿰어 찬 마당이니 정통성문제는 이미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 법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붉어져 나왔다. 바로 그의 통치스타일이 문제가 됐다.

18년간 박정희 독재시절을 견디어내고 8년간의 전두환의 또 다른 독재를 견디어낸 우리 국민에게 더 이상의 권위주의적인 정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산업화’와 더불어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내자는 시대적 상황과 국민적 요구가 당시 우리 사회분위기를 압도했다.

이러한 역사의 조류와 사회적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읽고 있었던 노태우가 취한 노선은 바로 ‘자유방임식 통치’였다.

전두환식 권위주의 통치는 더 이상 국민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웠고 노태우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가 취한 조치는 경제를 정치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었다.

그는 웬만한 경제정책은 각 소관부처 징관들이 소신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도록 권한을 대폭 위임했다. 그리고 책임도 수시로 물었다.

이미 수 십 년간 대통령이 일일이 매달 수출실적을 챙기고 관계 장관을 독려하며 군사작전식으로 경제정책을 펼쳐나가는데 익숙했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노태우의 자유방임식 경제정책은 거의 ‘손놓고 있는 경제정책’이나 다름없었다.

자연 여기저기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아우성들이었다. 노태우시절 경제분야 장관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전임 전두환시절 경제장관들의 평균 재임기관과 특히 차이가 나질 않았음에도 불구 많은 국민들에게 유독 노태우정부 시절에는 경제장관이 너무 자주 바뀌었다는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모든게 뒤죽박죽,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정부. 장관만 바뀌며 모든 게 바뀌는 정부정책. 그야말로 도대체가 국민들이 정부정책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으로 사태가 치닫게 됐다.

경제정책의 표류는 곧바로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고 그에게 ‘물태우’라는 비난이 솟아졌다.

이러한 국민적 아우성 때문에 1991년부터는 노태우의 ‘자유방임적인 통치스타일’이 다소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는 집권기간 내내 경제정책의 결정이나 집행을 경제부처의 책임자들에게 일임하려고 했고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한 듯하다.

그는 자신의 역사적인 소임이 권위주의적인 정부를 민주화정부로 전환시키는데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나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주의나 복지이념을 억제하면서 경제발전을 최우선과제로 삼는 나름의 통치철학을 가지고 힘으로 밀어부쳤지만 노태우는 ‘민주화’된 정부를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로 삼고 복지가 가미된 균형성장과 국민화합 그리고 통일기반조성을 주요정책과제로 제시하고 출발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제들이 경제정책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다 보니 경제정책의 표류는 결국 여타의 다른 정책목표까지 표류하게 만듦으로써 노태우정권기간 내내 소신없는 ‘물대통령’이라는 비아냥이 그를 따라 다녔다.

위로부터의 강력한 지도력에 따라 움직이던 공무원조직마져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는 복지부동현상이 심화돼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노태우를 그전의 역대 대통령과 비교해 볼때 민주성과 정통성면에서 보아 크게 나무랄데는 없다.

폭압적인 정치에 시달리고 권위주의에 익숙해 있던 국민들에게 역사적인 보상차원에서 그의 집권기간 중 ‘민주적인 지도자’를 바라는 국민적인 정서를 중시하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비교적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나 당시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국민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자유방임’에 가까운 형태의 유약한 통치를 지속한 것은 그의 우유부단한 퍼스널리티(personality)와 함께 비웃음거리가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노태우식의 ‘자유방임식 민주주의 리더쉽’은 아직 우리나라에는 맞질 않는 민주주의가 꼴을 피운 먼 나라의 지도자의 리더십 정도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노태우는 관심의 촛점이 경제에 있지 아니했고 집권후 상당기간 정부내에 낙관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경제정책에 대한 의욕 또한 역대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대통령을 어쨌던 국민적인 여망이었던 직선제를 통해 선출함으로써 어느정도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과 입법과 사업부 또한 어느정도 정부의 무소불위적 행정권능에 대해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초보적인 형태의 3권분립 정치구조가 만들어짐으로써 노태우정권시절은 분명 정치면에서는 상당히 발전지향적인 양태를 가질 수 있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국민들의 의사표출이 언론의 자율성 신장,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참여확대 등 현상과 맞물려 사회가 대단히 혼란스럽고 이를 이끌어 나갈 국가최고지도자의 리더쉽은 상당히 나약해 보여 사회전체적으로는 카오스(혼돈)와 같은 상황이 전개됨으로써 국민적인 통합성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이 노태우집권기간 내내 전개됐다.

특히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정치질서의 요건을 갖춘 듯했지만 사회의 구조적인 적폐와 모순은 전혀 시정되지 않고 이어져 후일 두고두고 우리 한국사회의 또 다른 사회불안 요소가 되었던 점은 비록 6.29선언이라는 극적인 정치이벤트를 통해 형식적으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했지만 결국 뿌리가 같았던 두 정치군인출신 지도자들이 극복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난해하며 풀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독재국가에서 민주화되는 국가에로 전환되는 시기의 역사의 과제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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