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20세기 후반 2차대전 종전 후 국제질서를 견고히 지배해 오던 냉전체제가 붕괴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85년 미국은 레이건 정부 집권 2기를 맞이했고, 그해 3월 소련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과 개방을 기치로 한 이른바 신데탕트 체제로의 전환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소련의 개혁 개방정책은 70년간 지속되어온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냉전체제의 붕괴는 곧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거대한 역사적인 격변기에 당시 노태우정권은 비교적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대처했다. 바로 북방정책의 공격적인 수행이었다.

노태우 정권시절 북방정책은 크게 두 가지 즉 대북포용정책과 북방수교정책으로 나눠져 수행됐다.

사실 북한에 대한 다양한 대북정책은 5공 전두환 시절부터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북방수교정책은 이러한 대북 포용정책과 더불어 6공 노태우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정책이었다.

당시 북방정책은 미일 중심의 반쪽외교에서 탈피 전방위 세계외교를 목표로 했다. 이는 훌쩍 커져버린 대한민국의 경제역량을 바탕으로 공산권에로의 경제무대확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북한과 우호관계를 수립해오고 있던 동구권 공산국가들과의 수교확대라는 목표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대북 밀사 역할을 해오다가 1985.3 당시 안기부장 특보로 자리를 옮긴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의 비밀지시에 의해 ‘북방정책’의 전도사로 임무를 맡게 된다.

박철언은 그의 저서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이 북방정책 정책 수립 시행과정에서의 많은 비사를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당시 북방정책의 추진은 노태우 정권 차원에서는 ‘벅찬 도전’이었고, 박철언 개인차원에서는 ‘위험한 모험’이었다고 박철언은 술회하고 있다.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 최초 대상 국가는 헝가리였다.

박철언(후일 노태우정권 장관역임)을 중심으로 한 비밀특사단이 헝가리와의 수교를 목표로 비밀협상을 여러 차례 가졌다.

헝가리 측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매우 조심스럽게 한국과의 수교협상을 극비리로 진행했다.

처음 헝가리 정부는 한국 측에 국교수립의 대가로 50억 달러 규모의 경협차관을 요구했다.

‘용공외교’, ‘밀사외교’, ‘밀실외교’, ‘졸속외교'라는 비난을 받아가며 결국 한국과 헝가리는 1988년 9월 13일 서울 88올림픽 개최 4일전 전격 양국수도에 상주대표부설치 합의사실을 국제사회에 공표했다. 88올림픽을 치른 이후 1989년 2월 1일 한국 헝거리간 공식수교를 발표했다.

북한은 한국과 전격 수교를 체결한 헝가리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연이어 1989년 11월 1일 한국 폴란드 간 국교가 수립되고 여러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가 숨 가쁘게 진행됐다.

한국-유고슬라비아(1989.12.27), 한국-체코(1990.3.22), 한국-불가리아(1990.3.23), 한국-루마니아(1990.3.30), 한국-몽골(1990.3.26), 한국-알바니아(1991.8.23)간 국교가 수립되는 등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동구권 여러 나라들과 국교관계가 수립됐다.

공산권 국가와의 국교수립 중 백미는 소련과 중국과의 국교수립이었다.

소련과의 국교협상은 1988년 봄부터 비밀리에 진행됐다. 1990년 6월 4일 노태우와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이후 양국간계는 급물살을 탔고 1990년 9월 30일 드디어 한국-소련 간 정식외교관계가 성립됐다.

1990년 12월 14일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 대통령 노태우와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간 한·소 모스크바선언이 있었다.

노태우의 소련 방문은 1905년 한 소간 국교가 단절된 이래 거의 86년만의 역사적인 방문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출국인사에서 자신의 소련방문이 이 세계에 넘치는 화해와 협력의 물결이 동북아시아에도 미치게 하여 분쟁, 대결, 반목의 낡은 틀을 깨고 평화와 번영을 향해 협력하는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는 시발이 될 것임을 밝히었다.

남북이 서로 동족을 살육한 6.25 전쟁의 뒤에는 소련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전략 뒤에도 늘 소련이 있었다.

1990년 12월 14일 한-소 모스크바 선언은 양국의 불행했던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끝나고 공존과 번영, 평화의 새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6공화국 출범이후 노태우는 유엔총회연설, 미의회 연설, 일본 국회 연설, 동구권 순방 등 일련의 정상외교를 통해 북방정책의 기조를 다졌고 이날 모스크바 선언은 6공화국이 꾸준히 추진해 온 북방정책이 최대의 결실을 거두었음을 의미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교를 위한 비밀접촉도 활발히 전개됐다. 중국은 특히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중국도 외면할 수 없었다.

1991년 1월, 한국의 무역대표부가 베이징에, 그해 4월 중국의 무역대표부가 서울에 설치됐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공동선명 후 그해 9월 26일 한중정상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한국과 베트남간 국교수립이 1992년 12월 22일 뒤를 이었다.

마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노태우의 북방정책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풍에 돛단 듯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박철언팀’에 의한 동구권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수교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89년 1월 7일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 김중휘, 국방장관 이상호, 합참의장 최세창, 육군참모총장 이종구가 만나 시국현안에 대해 저녁식사를 곁들인 대화를 나눴다. 이때 이들은 우리사회에 6개 층의 반체제 우려세력이 존재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고정 간첩, 자생 공산주의자, 어설픈 민족주의자, 좌경 학생, 기층 민중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또한 당시 한참 설왕설래 논의가 되고 있던 국가보안법개정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특히 국가보안법개정시 대공체제를 약화시키는 조항의 삽입에 대해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태우의 북방정책추진에 대해 국내 보수층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 즉 6.25라는 동족간의 참혹한 전쟁을 치렀던 대한민국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스러운 사회갈등의 한 측면이기도 했다.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에 이와 같이 국내의 광범위한 비토세력들의 반대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는 보수 세력들의 북방정책 반대의견에 대해 노태우는 “북방정책은 우리나라가 장차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한 원대한 비전아래 추진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노태우는 1989년 1월 16일 통일원 새해업무보고시 “나는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대통령, 민족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의 전기를 마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를 희망한다”고 훈시한 적이 있다.

노태우정권시절 북방정책은 개인적으로는 그의 처조카인 박철언에 의해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박철언은 그의 회고록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이 북방정책의 전개과정시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후일 후임대통령이 된 김영삼에게 북방정책수행과정에서 불거진 불협화음과 정치적인 협조를 거부한 부분이 괘씸죄가 되어 김영삼 정권시절 옥살이를 하는 비운을 겪게 되기도 했던 박철언은 이 회고록에서 전두환 정권시절부터 시작된 대북특사로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북방정책이 추진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북방정책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꽉 막힌 냉전 구조 속에서 무엇인가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보고자했던 당시 정권의 핵심주역들이 열정을 가지고 자주적인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정책이었다.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엄중한 국제역학관계 현실속에서 민족의 자주적인 활로를 개척하려했다는 점에서 이 시절 북방정책은 매우 전향적인 정책이자 ‘위험한 정책’이기도 했다.

노태우의 북방정책은 이미 분단구조가 고착화돼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에 기생한 우리사회 보수세력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현실속에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용감한 정책'이기도 했다.

노태우를 ‘가발 쓴 전두환’ 정도인줄로만 알고 있던 이들 보수세력들의 입장에서 보아 북방정책은 그야말로 그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황당하고도 위험천만한 정책’으로 비춰졌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박철언은 북방정책을 실무선상에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오로지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의 신임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 또한 박철언으로부터 올라오는 북방정책 실무협상결과에 만족을 표했고 박철언에게 수시로 힘을 실어줬다.

박철언은 이러한 노태우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등 전공산권으로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전례 없는 과감한 외교정책이었고 대한민국의 탄생에 산파역할을 했던 미국입장에서 보아도 결코 편안한 시각으로만 볼수는 없었던 ‘대담한 정책’의 전개였다.

급속히 진행되던 당시 노태우의 북방정책에 대해 미국 조야는 경악했다. 미국의 보수층들은 자칫 한국이 북방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CIA를 중심으로 미국정부와 조야는 당시 북방정책의 중심에 서있는 박철언에 대한 우려와 견제를 하였지만 박철언은 노태우의 신임에 바탕을 두고 북방정책을 빌어 부쳤다.

노태우정권이 끝나갈 무렵 새롭게 한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한 공산권국가는 여러 나라에 이르렀다. 이래서 반쪽 외교에 국한되었던 그간의 한국 국제외교무대가 북방정책을 기점으로 비로써 정상화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논의과정에 수많은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 호시탐탐 대권을 꿈꾸던 민주화 투쟁인사이자 야당총재출신이었다가 보수세력의 결집을 위한 명분을 내걸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3당 합당을 통해 야당총재에서 일약 집권민자당의 중심인 최고위원으로 급부상하였던 김영삼은 북방정책의 과정에서 자신도 일정한 지분을 챙기고자 부심했다.

김영삼과 박철언의 갈등과 반목이 바로 이 북방정책수행과정에서 붉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박철언은 노태우의 친서를 휴대하고 소련 최고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김영삼과의 방문을 박철언은 극구 사양했으나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함께 방문하라는 지시받고 둘은 모스크바 방문길에 올랐다.

김영삼은 이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자신이 국제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국내에서 주목받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미 박철언에 의해 소련과의 비밀 회담이 상당부분 진전되어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그 틈바구니를 김영삼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질 않았다.

박철언과 김영삼의 알력은 이 소련방문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당시 박철언이 김영삼과 '동행'이냐 '수행'이냐를 놓고 한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철언이 김영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동행’한다고 표현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박철언과 보이지 않는 삿바 싸움을 하던 김영삼은 고르바초프와 그야말로 극적으로 만나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소련과의 국교수립에 자신이 이니셔티브를 쥔 것처럼 한국 언론에 이 사진을 흘리는 고도의 언론플레이를 했다.

사실 김영삼과 고르바초프의 만남은 외교적인 절차를 충분히 거친 정식 만남이 아니었고 김영삼이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끝에 그야말로 스쳐지나가듯 잠깐 만난 것 뿐이었음에도 불구 다음날 국내언론에는 마치 김영삼과 고르바초프가 정상외교라도 한 듯이 대문짝만하게 난 것이다. 여론정치에 능했던 김영삼의 ‘언론플레이’였다.

나중 이 전 과정을 보고받은 노태우는 소련에서 돌아온 김영삼에게 어설픈 쇼를 하지 말라는 엄중경고를 했다.

북방정책을 현장에서 진행하던 박철언은 후일 그의 회고록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그 당시 김영삼과의 알력이 결국 김영삼정권 탄생 후 시범케이스로 자신이 정치적인 희생물이 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그의 회고록에 담았다.

김영삼의 입장에서 북방정책의 이니셔티브를 자신이 쥔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했지만 결국 이것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들통이 나자 노태우 대통령에게 불려들어가 ‘경고’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이미 신문 방송에 김영삼과 고르바초프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대중들에게 알려진 후의 일이었다. 대권도전을 위한 플랜을 가지고 3당 합당이라는 헌정사에서는 보기 드문 정치이변을 감행한 정치9단 김영삼이 노태우의 북방정책의 과실을 훔쳐 자신의 대권도전의 교두보로 삼으로 했던 씁쓸한 사건이었다.

여하간 다양한 에피소드를 뿌리며 초고속으로 진행되긴 했으나 노태우정권시절 압권으로 평가되는 노태우의 북방정책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미국 일변도의 편중된 한국 외교에 시대적으로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1990년 12월 15일 신문에서 “이번 한 소정상회담은 과거의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소련과 한국이 일전하여 긴밀한 우호관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는 것을 내외에 표명한 것이며, 한국과 일본, 미국, 북한과 중국, 소련 등 두개의 그룹에 의한 한반도의 밸런스관계가 그 밑바닥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소련의 타스 통신 등도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방문으로 한 소관계가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으며 냉전시대의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북방정책의 급속한 전개과정을 지켜보며 이미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이들 외신은 날카롭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탈냉전시대로 변화하는 국제역학관계에 잘 편승 한반도 평화정착의 한 기틀을 제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모스크바 선언은 부분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험 해소를 위한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의미도 있지만 포괄적으로는 동북아지역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정치적인 안정장치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노태우는 1990년 12월 15일 모스크바 대학 초청연설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라는 제하의 연설을 통해 한소관계의 정상화는 우리겨레에게 그토록 큰 고통과 비극을 가져다 준 냉전체제의 종막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것은 냉전의 땅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재촉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북한으로 하여금 대외적으로 자신들이 고립돼가고 있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소 수교로 소련은 45년간 맹방이었던 북한 대신 한국을 발전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이것은 북한과의 관계를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한 뒤에 내려진 결단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당시 북한은 한-소간의 국교정상화에 배신감과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다.

노태우는 모스크바 대학연설에서 이 점을 우려한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연설로 남겼다.

“우리는 북한의 고립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소련이 우리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과 똑같이 북한과 기존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그들의 오랜 폐쇄노선으로부터 나와 우리는 물론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계에 넘치는 개방과 개혁의 물결을 북한만이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노태우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된 북방정책은 그의 유약한 지도력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일에 편중됐던 한국경제가 이념과 체제를 초월 세계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정책적 선택이었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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