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최근 한국과 일본의 관계, 특히 이른바 ‘혐한류’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 가는 일이 많았다. 사실 대한민국의 국제관계에서 일본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으니, 이에 관해 연구하고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몇 개의 발표를 듣다 보니, 이런 발표 상당수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의구심이 생겼다.

한국이건 일본이건 연구자의 국적에 상관없이, 참석한 학술회의에서 보았던 발표 상당수의 내용은 평범한 한국과 일본 국민 사이에서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을 해왔느냐는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매우 중요하니 지원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 것도 단골 메뉴다.

물론 평범한 양국 국민들에게 서로를 이해시키는 작업은 중요한 일이고, 여기에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나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관심과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가장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굳이 전문가에게 예산 들여 연구시키고 학술회의에서 발표해야 할 학술적인 문제인지 의구심이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주장의 현실성도 좀 의심스러웠다. 두 나라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수평적 협력, 한일 양국의 공생비전을 만들자는 말을 그럴 듯해 보이지만 언제는 이러지 말자고 한 적이 있어나 싶다.

이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기려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장애물을 어떻게 넘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 없는 구호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논리 아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말도 나왔지만, 서로의 이권이 부딪치는 냉엄한 현실을 감안하면 무엇이 현실을 뛰어 넘을 감동이 될 수 있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물론 뭐가 논리보다 중요한 감동인지 제시되지도 않았다. 이런 내용으로 상당부분을 채운 학술회의를 보면서 답답함을 느낀 것이 이상한 것일까.

이런 식의 ‘연구’라는 것은 특징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집착한다는 점인 것 같다. 사실 이를 만들어낸 힘과 요인에 대한 분석이 없다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라는 것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인 현상에만 집착하면,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외면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발표자는, 이른바 ‘혐한류’를 조장하는 조장하는 일본 시위대와 그들의 행각을 보여주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서 그런 시위가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이들의 행각이 자연발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일본 문화는 자신의 권리 주장에 대해 관대한 서구문화와는 조금 다르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 문화에서, 이런 과격한 시위가 발붙이기 어렵다. 더욱이 카메라로 찍고 있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사람을 집단 폭행하는 짓은 일본이 아니라, 시위에 관대한 곳에서도 용납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수준의 폭행은 설사 시위대의 주장이 정당한 것이라 해도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발표자 자신의 입으로, 이런 짓을 하고도 버젓이 얼굴까지 찍힌 자들 중 한 명도 처벌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인정받는 일본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뒤집어 말하자면 일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누군가가 이런 시위를 조장하고 지원한다는 뜻이 된다.

필자 자신부터도 비슷한 일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잘 안다. 직접적인 폭행보다는 좀 정도가 덜하지만, 노골적인 거짓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모략하는 행위가 사회 규범에서 용납될 리는 없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재출간 된 책을 ‘재탕’이라고 인터넷에 올려 모략을 한다던가, 자기들 마음대로 욕이나 다름없는 내용을 당사자에 대한 소개라고 올리는 짓을 하는 사이트에 대해 공권력은 엄청나게 관대하다. 

권력자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SNS까지 조사해서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공권력이, 이럴 때 만큼은 철저하게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한다. 이런 일이 무사히 넘어가는 경우가 계속 나오면 권력의 취향에 맞는 짓을 하는 쪽은, 혐한 시위대처럼 카메라에 얼굴 드러내놓고 사람을 폭행해도 무사히 넘어가는 데에까지 발전하기 쉽다.

배후에서 조종하는 권력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껍데기만 보면, 혐한 시위대의 행각 역시 몰지각한 일본인의 일부가 벌이는 악행이라는 것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일본인 자체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일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이러니 피상적인 현상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만드는 배후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으면, 연구하는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지적을 몇 번 해봤지만, 대다수의 발표자들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평범한 소수의 사람들이 아무리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봐야, 권력을 가진 쪽에서 장난 한번 치면 이런 노력 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는 ‘식은 죽 먹기’다. 그렇게 인기를 끌던 ‘한류’를, 순식간에 ‘혐오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는 현실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한국 측이라고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고 보기는 무리다. 자신이 생색내기 위해 쓸데없이 일본 측을 자극하는 일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수많은 한국과 일본 국민들이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했던 성과를, 얼마 되지도 않는 자들이 한 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런 점을 외면하면, 한국과 일본 뿐 아니라 지구촌 사회의 어떤 갈등이라도 근원적인 해결을 시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역사에 좀 관심을 가지면, 이런 일은 정치의 고전이라고 할 만큼 흔한 것이었음을 깨닫기 어렵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의 히틀러다. 그는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조장해, 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의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그이 의도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던 점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왔는지 굳이 확인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일본의 아베 총리 역시 장기 불황에 빠져 있는 일본 사회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 수법을 쓰고 있다는 점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역사적 교훈이 이와 같이 명백하다면, 전문가 집단도 최소한의 의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근원적인 원인을 지목해 치유하기 보다는, 힘 있는 쪽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생색이나 내는 연구성과를 내는 데 치중하는 것 같아 답답할 뿐이다. 하긴 이렇게 해야 개인적으로는 생존과 출세에 유리할 테니 이해는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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