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며칠 전인 7월 1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왕성인지 여부를 따져보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필자는 2009년에 이 문제로 20년 동안 연구해왔던 건축학자와 공저로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곳이 한성백제왕성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 터라, 이 문제를 밝히자는 심포지엄에 흔쾌히 응했다. 이와 함께 개인적으로는 이번 심포지엄이, 어느 쪽 주장이 제대로 된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 밝힐 기회가 되기는 바랐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소박한 바람에서만 그칠 문제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문제가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단순한 문제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주변에서 역사에 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조차 이번 심포지엄의 의미를 이런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숨겨진 의미를 설명하는데 애를 먹곤 한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런 의미를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먼저 서울시에서 풍납토성 발굴에 2조원이라는 자금을 투입한다는 보도가 있었음을 상기시켜야 할 듯하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될 정책이 실행 직전이라는데, 만약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라면 어찌될까? 엉뚱한 곳에서 왕성 찾겠다고 조 단위의 국민 혈세를 붓는 꼴이고, 더 나아가 막대한 자금을 퍼붓고도 진짜 한성백제의 왕성은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훼손되도록 방치하는 꼴이 된다. 이것 하나만 해도 풍납토성 관련 시비는 단순한 한성백제 왕성 위치 문제가 아니라, 조 단위의 국민혈세와 진정으로 보존해야 할 유적이 걸린 문제라는 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백제 왕성 문제는 본질적으로 역사 문제이니 이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 한 가지만 더 언급해보자. 최근 웅진-사비 시대의 백제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일이 있었다. 이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이 경사에 가려지는 측면이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웅진-사비 시대의 백제 역사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국사를 넘어 일본고대사까지 걸린 동아시아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문제는 주로 한성백제 시기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동아시아 고대사에 있어서 앞뒤 시대에 대한 해석까지 영향을 주는 시기가 바로 4세기다. 일본고대사에서부터 ‘수수께끼의 시대’라고 불리고 있고, 이는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관계를 해석하는 방향의 혼란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 백제사나 고대한일관계사를 넘어, 4세기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 시기의 국제관계가 어느 시대 어느 분야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사실은 이 시기 동아시아 북부에 고구려라는 강력한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군소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제는 남쪽에 바로 이 고구려에 대항하는 세력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짜 골치 아픈 문제의 핵심은 백제-가야-왜로 구성된 이 세력의 구심점이 어느 나라였느냐는 점이다. 6세기에 소멸할 때까지 통합되지 못했던 가야를 구심점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니, 자연스럽게 백제와 왜가 남는다. 이 중 어느 세력을 반 고구려 동맹의 구심점으로 보고 동아시아사를 복원하느냐에 따라, 이 시대에 대한 인식도 천지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왜를 고구려의 라이벌로 보아 당시 국제관계의 축을 고구려-왜로 파악하고자 하는 일본학계 중심의 연구자와 백제를 그 자리에 놓고자 하는 연구자가 도저히 같은 지역 같은 시대의 역사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상반된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이 정도면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백제의 웅진-사비시대보다, 한성시대가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한성백제왕성이, 이 논란에서 어떤 지표가 되는지도 나온다. 왕성은 지금의 수도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 나라의 첨단 기술과 경제력이 집중되는 곳이다. 지금도 이런 현상이 사회문제가 되지만, 과거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더 극심하게 일어났던 현상이다. 그러니 왕성의 규모와 기술수준은 그 나라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을 평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점을 의식하고 ‘풍납토성=한성백제왕성’이라는 결론의 의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가늠해보자. 성벽 넓이까지 다 포함시켜봐야 18만평 정도에 불과한 풍납토성에 비해 일본의 왕성은 800만평이 넘고 왕궁만 80만 평 수준에 달한다. 이 수치는 백제의 국력이 왜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는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일본의 왕성은 100년에서 200년 쯤 뒤에 건설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산업혁명 이전이다. 요즘처럼 몇 십 년 만에 국가의 생산력이 수십 배가 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고, 당연히 경제력을 포함한 국력도 그리 큰 차이가 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왕성의 규모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할 수는 있지만, 여기에 왕궁의 규모는 또 한방의 결정타가 될 수 있다. 왕궁은 단순히 왕족들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집무를 보고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할 공간은 물론, 외국 사신 접대를 포함한 각종 행사를 치를 공간이 확보돼야 한다. 현재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지역이 왕궁터가 아니라는 점은, 풍납토성을 왕성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공인하는 바이다. 그러니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을 빼고 나면, 한성 백제 왕궁이 있을 공간은 수천 평 정도나 확보될지 의문이다. 여기에 백제 같은 불교 국가의 왕성에 필수적으로 따라 붙는 대형 사찰이 있어야 할 공간은 후보지를 찾기도 힘들 것 같다.

이런 시설이 확보되지 않는 나라였다면, 백제의 국제적 위상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시설도 확보하지 못한 나라가, 국제사회를 주름잡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보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정도 설명이면 한성백제 왕성 찾기가 왜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목숨이나 다름없는 필자의 학문적 인생을 걸고서라도 이 문제만큼은 확실하게 검증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험한 꼴을 볼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이 문제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심포지엄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려하던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인 심포지엄이 열리기 직전의 날짜 7월 10일,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도로는 ‘백제 왕성의 중심도로가 틀림없다’는 한 교수의 인터뷰가 곁들여진 신문 기사가 떴다. 이 보도 내용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동 교수의 말처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왕성이라는 점이 증명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내막을 알고 보면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전문가들에게는 1600년 전에 만들어진 20m의 도로가 대단한 것이고, 그래서 왕성에만 존재하는 도로였던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폭 120m의 주작대로가 발견됐다면 몰라도, 20m 정의 도로라면 웬만한 성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도로라는 점은 이 분야에서 상식이다. 단지 고고학계에서 도로 발굴의 중요성을 느낀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국내의 도로 발굴 성과가 적은 것뿐이라고 한다.

이런 도로가 굳이 왕성의 도로였다는 점을 증명하려면, 바둑판 모양으로 연결될 도로 자체를 따라 구획이 지어진 자리에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집터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도에 의하면 이번 발굴은 35m 정도에 불과해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다. 또 여러 개의 산줄기가 성안으로 뻗어 들어와 있는 몽촌토성의 지형을 알면 이런 구획을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사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가‘이미 찾아 놓은 한성백제왕성을 두고 쓸데없이 시비를 건다’는 인상을 주게 만들어 놓은 셈이다. 사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보도에 여러 가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작년에 발견했다는 도로의 기사가 왜 하필 심포지엄 직전에 보도되었는지부터 이상하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학계에서 언론을 이용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한두 번도 아니다. 폐우물터를 발굴해놓고 ‘대형목탑터’라도 보도해 버린 일은 아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이다. 나중에 도저히 우길 상황이 되지 못하자, 언론에 폐우물터라는 기사를 조그맣게 내보내며 오류를 덮었다. 그 바람에 아직도 풍납토성에서 대형목탑터가 발굴됐다고 아는 사람 많다.

이보다 더한 것이 2010년 ‘풍납토성 내부에서 왕궁 혹은 그 부속건물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적심시설(積心施設)과 초석 건물지가 발견됐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간 것이다. 이는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대형초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하자, 이에 대하 반증을 찾았다고 언론을 이용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돌아가신 공저자 강찬석 선생은 발표가 되자마자 확인한 바 있다. 이는 초석의 크기는 물론이고, 적심시설이라는 것 자체가 왕궁급 건물에 적합한 건축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학술발표를 통해 알려줬다. 물론 이런 내용은 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어주지 않고 그냥 묻어버렸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점잖은 학자들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풍납토성을 백제왕성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뻔한 거짓말,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해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언론에 흘려 여론을 조작해왔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를 야비한 언론플레이라고 부르는 것이 지나친 말일까. 그리고 이번에도 이전부터 써왔던 바로 그 수법을 그대로 쓴 것이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왜 이런 짓까지 할까. 어느 언론은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왕성이 아니라는 주장의 이면에 흑막이 있다고 보도했지만, 한성백제왕성으로 몰고 가려는 이면에는 이보다 훨씬 더 괴기스러운 흑막이 있음을 시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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