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얼마 전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왔다.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파렴치한 짓을 하는 풍조에 대한 한탄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왜 이런 풍조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분석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한 친구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이런 풍조는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민통치라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이방인들이 대다수의 현지인들을 지배하는 구조다. 말이 지배일 뿐이지, 사실 ‘착취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러다 보면 기본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압도적인 무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기만 하다보면 여러 가지 곤란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이럴 때 고전적으로 써먹는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현지인들 중에서 식민통치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인물들을 골라서 상대적인 특권을 주고, 동족들을 관리하게 하는 수법이다.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서도 이런 수법을 써먹었다. 수용소에 잡혀 온 유태인 중 일부를 골라서, 우스갯소리로 ‘줄반장’ 정도의 권한을 주고 같은 유태인들을 관리·감독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편안해 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들이 알아서 동족들을 통제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방인들보다 더 지독하게 구는 자들도 나온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통해 소수의 이방인들이 다수의 현지인들을 손쉽게 통제하고 착취해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만 해도, 일본 경찰보다 경찰 앞잡이들이 더 심했다는 말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점이 친일파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착취해 가는 쪽에서야 매우 좋은 방법일 수 있겠지만, 당하는 쪽의 사회에는 아주 고약한 풍조가 생기게 된다. 쥐꼬리만한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동족들을 이방인에게 팔아넘긴 자들이, 착취당한 동족들에게 당당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짓을 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지는 않는다. 그럴 사람들이었으면 애초부터 동족들 팔아넘기는 일에 나섰을 리가 없을 테니.

이 점이 이방인에 의한 착취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 없는 풍조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당당하게 살려면, 이런 짓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풍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렴치한 짓을 한 당사자들에 대해 군소리를 못하게 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건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게 된다.

그래서 그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식민통치자와 그 앞잡이들에 대한 비판이 금기가 되는 것이며, 그런 비판을 시도하면 그야말로 그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려 한다. 이것만으로도 사회 풍조는 고약해진다. 다 같이 잘 되는 방법을 찾기보다, 자신의 쥐꼬리만한 특권을 위해 다른 사람 팔아먹는 풍조가 되기 십상이니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이런 풍조는 식민통치가 끝난 다음이라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민족에 붙어 이권을 챙기던 족속들이, 식민통치가 끝났다고 자기들의 특권을 내놓을 턱이 없다. 오히려 그동안 식민통치를 해먹던 집단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그들의 재산과 권력을 이어받아 기득권을 이어가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대부분의 나라에서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민통치를 경험한 나라들 대부분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옛 상전들이나 새로 등장한 강대국에게 이권 팔아먹는 일에 관대했다.

이는 반역행위를 한 집단이 기득권을 유지했다는 단순한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전한 풍조를 만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다 같이 잘되어 보자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쪽에 잘 보여야 다른 사람 짓밟고 그만큼 잘 살게 된다는 인식을 심으려 한다. 이렇게 되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는 풍조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이런 일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척도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권희영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면 된다. 얼마 전 ‘CBS 박재홍의 뉴스 쇼’라는 프로그램에서 권희영 교수와 앵커 사이에 친일청산 문제에 대한 대화가 보도된 바 있다. 여기서 권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청산 문제를 아주 잘 처리했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 식민 치하에서 한국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기용하다 보니 친일파 기용도 불가피 했다고, 친일파의 0.6%만 법정에 세웠던 것도 그건 부분적인 것만 가지고서 침소봉대한 것이라 숫자로만 파악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인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심한 경우만 처벌하는 온건한 정책을 썼을 뿐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라는 것까지 만들어 친일 청산작업을 했다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친일경찰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친일청산을 방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냐는 앵커의 질문에 권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아주 잘 하신 거’라며,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입장을 밝히신 것’이라고 했다. 노덕술 석방 요구도, 인재 부족 때문에 기용한 것이지 이를 친일파 비호와 연결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사건조차도, ‘삼권분립 위배에 대한 시정조치’란다. 그러면서도 ‘반민특위 활동을 허용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방송으로 이런 말을 들으면서 여러 사람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실 조금만 따져 봐도 어떻게 저런 식으로 갖다 붙일까를 의아하게 여길 수 있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언급하기로 하고 그 논리의 문제점부터 정리해보자.

인재 부족 때문에 친일파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권 교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친일행각 비호세력이 해방 이후부터 애용해오던 논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러한 논리의 문제점은 쉽게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권교수 같은 부류가 대중들에게 알리기를 꺼리는 사실이 있다. 사실 소련이나 북한도 친일파보다 더한 일본 식민통치자들까지 이용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들 대부분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 이용한 다음, 역할을 끝내자 수용소로 보내는 식으로 처리해버렸지, 우리 사회처럼 기득권을 유지시켜주지는 않았다.

이런 점을 알고 보면 우리 사회 친일 행각 청산의 본질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인재가 부족해 일시적으로 등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사회 기득권층으로 남았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인재부족은 핑계라는 점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권희영 교수에게 그렇게 인재가 모자랐으면, ‘능력 있는 공산주의자도 써야 했을 거 아니냐’고 하면 뭐라고 답할까? 사실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동족을 팔아먹었던 친일파의 행각 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가 누구 좋으라는 것인지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공산주의건 친일파건 그것이 우리 사회에 해가 되니까 꺼린다면 몰라도, 권 교수 같은 이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절대 악’으로 규정했으니까 따라야 한다는 법 같은 것은 없다.

더욱이 3권 분립 운운하며 특경대에 대한 무력 사용까지 비호한 것은, 권 교수의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승만 대통령은 최소한 경찰의 폭력 사용을 방조했다는 비판은 면할 수 없다. 친일 청산을 위해 설치했다 하여 권교수 스스로도 대단하게 평가했던 반민특위에 대해 폭력을 사용한 사태가 어떻게 ‘삼권분립 위배에 대한 시정조치’가 되나? 권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이승만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차도 밟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도록 해도 상관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 것이 그가 그렇게 강조해 마지않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통령이 해도 되는 짓일까?

그런데도 권 교수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논리 퍼뜨리는데 집착하는 이유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이런 논리 누가 듣고 싶어 하는지만 생각해 보아도 해답은 간단하게 나올 테니까. 종북·좌빨로 매도하는 것도 다른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행각을 비호하는 식으로 기득권층에 의해 파렴치한 짓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각이 비호를 받는 한, 상생을 위해 뭔가 해보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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