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좌파정권이 탄생했다. 해방이 후 한국정치사는 극한적인 정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였다. 그 속에는 항상 분단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그어진 그 통한의 분단선은 그 후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민족을 남북으로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제15대 대통령선거가 막 끝난 직후인 1998년 봄. 서울지방법원 한 형사합의부 법정 재판부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검사석이, 우측에는 변호인단이 자리하고 빽빽이 들어선 방청객 사이로 경찰들이 인의장막을 치고 있다. 법정 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른바 지난 15대 대선을 전후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북풍사건’의 재판이 시작됐다.

반공 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 변호사의 변호인 심문이 시작됐다. 오 변호사가 검찰 측이 세운 증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증인은 또박또박 반박을 한다.

오 변호사가 증인의 답변을 가로막고 나섰다. 자신의 묻는 말에 ‘예’ 혹은 ‘아니오’ 라고만 대답하라고 했다.

“아니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고 부른 것이라면 뭐하러 나를 불렀소. 서면으로 신문하면 되지”

증인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증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증인석을 나가려고 했다. 황급히 법원경리가 막아섰다.

일순간 법정은 여기저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증인의 입에서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 오 변호사! 생사람잡지 마시오! 나는 간첩이 아니란 말이오!”

김대중이 당선되면 다 죽는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여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한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더욱이 김영삼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방만한 국정운영과 실책들로 인해 IMF 외환위기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돌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수십 년간 김대중(DJ) 집권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던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입장에서는 심각했다. DJ가 집권하게 되면 그간 자신들에 의해 자행된 온갖 정치공작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결국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온갖 이익을 향유한 그네들로서는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심각한 위기국면이었다.

1997년 11월말 당시 제1야당이던 ‘국민회의’ 안테나에 이상한 첩보가 하나 들어왔다. “안기부가 국민회의 CMJ를 이용해 뭔가를 엮으려고 한다” 는 것이었다.

CMJ은 국민회의 인천 부평을 지구당 위원장 ‘조만진’의 약자.

조만진은 오랜 전부터 안기부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가 안기부의 추적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이른바 DJ의 대북접촉의 막후 역할자이라고 안기부가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차례 중국을 드나들면서 안기부 안테나에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안기부는 이러한 조만진 국장을 엮어 김대중이 북측과 깊숙이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꾸미려했다.

DJ의 측근중의 한 사람인 그를 북측과 깊숙이 연계된 간첩으로 몰아세울 수 있다면 당시 16대 대선 또한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안기부의 음습한 공작은 ‘아말렉 작전’이란 암호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대선을 앞두고 기득권층의 위기의식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여 년간 야당생활을 해온 김대중이 집권하게 되는 경우 피의 보복이 시작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한국 정치권을 휘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대중의 인생은 기득권 수구세력에 의한 인고의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70~80년대 이른바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김대중이 겪은 고통은 이루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그 김대중에 의한 정권교체가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이었으니 기득권층의 불안감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보복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김대중이지만 정치란 게 그게 어디 말처럼 되는 일이던가.

지난 과거 어두웠던 한국정치사를 돌이켜보건대 끊임없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유당 정권시절 김구에 대한 이승만의 정치보복을 시초로 김영삼시대 박태준 등에 대한 정치보복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는 정치보복이 이 땅에 자행되었기에 기득권세력의 위기의식은 심각하기만 했다. 그들이 지은 죄를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당선되면 다 죽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심지어 대선을 이틀 앞둔 1997년 12월 16일, 한나라당 명의의 “서울에의 붉은 정권 불용” 운운 발언은 그 당시 기득권층들의 김대중에 대한 시각을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쯤 되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기득권층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명하지 않았겠는가. 

대선이 점차 다가옴에 따라 구 안기부는 DJ당선저지를 위해 혈안이 된다.

안기부가 선택한 카드는 DJ의 측근이었던 오익제씨의 월북에 따른 그의 편지와 평양연설 비디오 테이프 공개공세였다.

천도교 교령으로 지낸 오익제씨가 고문으로 국민회의에 들어온 것은 1995년 9월이었다. 그는 그 뒤 국민회의 종교특위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오익제씨는 1997년 8월 15일 월북한다. 그로부터 석 달 정도 지난 같은해 11월 말 오익제의 편지가 김대중 총재 앞으로 배달된다. 당시 국민회의는 적지 않게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회의 종교특위위원장까지 지낸 오익제가 월북해서는 김대중후보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익제 편지소동도 결국 안기부의 철저한 공작차원에서 이용되고 만다.

당시 국민회의가 입수한 안기부의 ‘오익제 편지사건 관련 기본 대응계획’을 살펴보면 오익제 편지를 활용해DJ를 단계적으로 압박해 들어가는 것으로 잘 나타나 있다.

안기부 핵심의 막판 북풍계획이 고스란히 국민회의 손에 넘어온 것이다. 안기부의 이런 막판 공작 계획은 상당부분 대선 과정에서 실제로 집행됐다. 북측도 1997년 대선을 전후해 북경에 대선 공작반을 운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풍’, 한국정치를 망치다

북풍은 한국정치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은 원흉이다. 구 정권시절 집권세력은 전가의 보도처럼 북풍을 이용했다.

북풍사건에 대한 재판이 한창 진행될 무렵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 자신도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땅의 정치를 망쳐놓은 북풍”이라는 표현을 쓰며 자신이 피해자란 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실 분단이후 이승만 정권시절을 거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항상 한국 국내정치의 최대 변수였다.

이승만 정권때는 북한 공산집단의 침략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내부결속용으로 이 북한 카드를 사용하곤 했다.

이승만에 이어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북한 카드를 자신들의 정적 숙청과 체제유지를 위한 카드로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당시 이후락 등 한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이 극비에 방북 김일성과 회담한 후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깜짝쇼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던 일반 국민들로서는 정권이 연출하는 북한 카드에 그냥 무방비 상태로 휘둘렸고, 남북 양 정권은 이러한 카드를 그들의 정권유지에 십분 활용했다.

그 기간 자유민주주의는 요원한 이야기였고 남북 공히 정치발전은 답보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시절에 이르러 북한 카드는 한국지도자의 극우적 성향과 함께 더더욱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전두환 정권초기 취해진 공포정치는 한국 내 민주주의 정치발전을 가로막은 독초였다.

김영삼 정권시절에도 사정은 별로 나아지질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조차 자신의 임기 내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 카드를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김일성이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각 정권 때마다 북한 카드는 때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조성을 위해서 때로는 정적제거나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정권에 의한 전횡적으로 사용돼왔으며 김대중 집권 전 북풍사건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들여다보면 당시 안기부가 당시 북풍사건으로 인해 수장이 구속되는 등 조직이 초토화되고 그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는 등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인식했는지 권영해 부장 또한 “패장은 말이없다” 라는 말로 당시 상황을 요약하고 있다.

과연 북풍의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그 최종승자는 누구인가.

북풍의 최대수혜자는 북한 당국이며 나아가 미국, 일본 등 주변 강국이다. 이러한 결론은 당시 검찰수사발표와도 맥을 같이한다.

당시 한국 검찰은 북풍사건의 본질은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원치 않는 북한과 이를 교묘히 이용한 구 안기부의 ‘합작공작’이라고 결론지었다.

당시 ‘북풍’ 수사를 맡았던 검찰 조사에 따르면 북한은 남북관계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노련한 정치인인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는 이른바 ‘DJ 불가론’에 따라 대선 전인 1997년 7월경 중국 베이징에 대선공작반을 급파해 오익제·김병식 편지사건과 오씨의 평양발언, 안기부 대남공작원과 정치인 방북사업가 등과의 접촉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색깔논쟁과 용공시비 등을 유도해 한국정치의 자중지란을 기도했다.

구 안기부 수뇌부는 이 같은 북한의 대남공작을 반DJ세력의 집권을 통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치공작차원에서 이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안기부도 북한에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대선을 며칠 앞두고 이미 북한 측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졌음을 간파하고 일체의 한국 측 요구 즉 북풍에의 협조요구를 묵살했고 이러한 북측의 속셈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한 채 북풍공작을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결국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또한 당시 안기부 조직과 채널이 궤멸됨으로써 한반도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무르려는 미국 일본 등의 주변국이 북풍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라는 사실이 설득력이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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