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얼마 전, 서울대학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중국고중세사학회 주체로 열린 연합학술회의에 참석했었다. 주제는 동아시아의 고대율령. 주제와 함께 다른 시대, 다른 분야 학회가 연합해서 학술회의를 치르는 상황을 보면 나쁘지 않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는 이른바 ‘학제 간 연구’라는 것이 강조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사실 별 것 아니다. 다른 분야 전문가들이 더 나은 연구 성과를 얻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것 정도로 알면 별 문제 없을 개념이니까.

이렇게 개념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많이 강조되는 이유가 있다.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어느 분야건 기초적인 정보의 발굴과 제공이 너무나 기본적인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 근원적인 원인이다. 이런 것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에는, 기본 정보를 충실하게 아는 것만으로도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초 정보 대부분이 공개된 지금, 그런 수준으로 제대로 된 성과를 내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전문가 집단도 한 단계 도약을 시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미 정리되어 공개된 정보를 많이 안다고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대는 거의 끝났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필자 역시 한 분야만 연구해서 내는 성과의 한계가 점차 드러나고 있음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은 이전보다 조금 어려워지게 된다.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발굴, 잘못 알려져 왔던 오류의 정정, 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한 검증 등 단순한 사실만 아는 것으로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작업을 해야 전문가로서의 가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초 정보가 알려질 만큼 알려진 한 분야의 연구만 가지고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 낼 방법이 필요해지고, 그것이 바로 다른 분야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점이 점점 부각되는 실정이다. 필자의 주 전공인 역사학부터가 그렇다. 사실 역사학은 원래부터가 종합적인 학문이다. 고대사 연구에서 고고학을 이용하는 것은 거의 기본이지만,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의학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사람 뼈 등에서 얻은 유전자 등을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많은 자료를 얻어낼 수 있다. 터밖에 남지 않은 고대 도시 연구에는 건축학, 특히 고건축학적 지식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역사학계에서 다른 분야 지식의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자료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이용해서, 이 자료들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의 번역 수준으로 해서 내놓고는 대단한 연구 성과라도 내놓은 것처럼 생색을 내기 일쑤였다. 상당한 분야에서 지금도 연구 성과를 내는데 이용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이럴 만큼 한 분야의 폐쇄적인 연구로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도 어렵고 검증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인접분야와의 연구협력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다른 분야와의 연구협력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 될 수 있다. 필자도 직접 경험해 본 바 있다. 발상의 전환은 다른 분야와의 접촉에서 훨씬 더 쉽게 얻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이러한 시도를 한다는 자체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막상 발표 내용을 보면 이러한 기대는 실망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강조한 목적에 맞는 연합학술회의라면, 당연히 발표 내용 대부분도 한국고대사나 중국 고중세사 연구 중 한분야만으로는 실체를 밝히기 어려운 문제에 집중되었어야 했다. 사실 ‘율령연구’라는 주제는 그렇게 해야 서로의 정보가 교환되면서 한 단계 발전된 연구성과를 기대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발표는 그런 기대에 맞는 것이라 하기에는 어려웠다.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중국사·한국사에서 율령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했을 뿐, 중국 율령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 같이 상대 분야의 정보를 활용하는데 별다른 관심을 보인 것이 별로 없다.

‘목간 자료로 본 백제·신라의 장적(帳籍)문서와 수취제도’라는 발표문은 특히 기대치에 못미쳤다. 이 발표문의 시작은‘새로 발견된 목간 자료들을 통해 중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율령의 전래 과정 내지는 영향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라며 ‘백제 율령의 계통과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머리말만 보면 그야말로 ‘동아시아 율령의 입체적 조명이 이루어지겠구나’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막상 내용은 백제 장적(帳籍) 목간의 내용을 나열하고 몇가지 용어에 대한 해설을 한 것으로 대부분을 채워놓았다. 그래놓고 정작 기대를 걸게 만든 백제 율령의 계통과 특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굳이 내세운다면 ‘백제 장적에서는 성별에 따른 분류가 없는 점을 보아 남녀구분 없이 동원한 것 같다’는 추측 정도 이상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설마 이런 것이 ‘백제 율령의 계통과 특성을 밝히고자’한 발표문 내용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필자가 보지 못한 측면이 있을까봐, 확인 차 사회자가 주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가 역력함에도 발언권을 억지로 얻어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렇지만 ‘자료가 너무 없다’는 상투적인 변명과 함께 공허한 답변 밖에 듣지도 못했다. 이런 내용이라면 평소 자료를 얻어놓았던 내용에 억지로 ‘동아시아 율령의 전래 과정 내지는 영향’을 끌어다 붙여 대단한 연구나 한 것처럼 포장해 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발표문들이 이런 수준이라면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기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사 분야에 대해서는 필자의 주 전공과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어 단언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한국고대사 발표문들은 연구성과 채우기 차원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정당화시키는데 더 신경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굳이 연합학술회의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든다. 평소에 발표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내용을, 그저 다른 분야 학회 사람들도 불러 모아 했다는 정도가 연합학술회의를 하는 목적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학제 간 연구’의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해주기는 더더욱 어렵다. 결국 평범한 내용을 가지고 연합학술회의라는 명분을 팔아 포장해놓은 셈이다.

문제는 이런 연구가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아서는 일정한 액수의 연구비도 지급되었을 것이다. 결국 국민 혈세로 생색만 내는 ‘학제 간 연구’를 했다는 꼴이 될 수 있다. 어차피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별 차이 나지도 않을 연구성과를 내면서, 공연히 ‘학제 간 연구’를 팔아먹는 꼴 밖에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 혈세에서 나온 연구비를 겉으로 보기에만 훌륭한 명분 팔아 받아내는 꼴, 다른 사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우리 학계가 과연 무엇을 위해 연구하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남들보다 약간 더 많이 아는 정도로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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