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지난 9월 11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정하기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최근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부·여당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듯했다. 필자도 직업상 관계가 되기 때문에 이날 아침 지방에 있었던 강연과 저녁에 선약이 있었던 부담을 무릅쓰고 이 공청회에 들렀었다.

그런데 조금 늦게 들어갔던 공청회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공청회에서는 주최 측이 선정한 발표자가, 토론을 가장한 덕담 몇 마디와 함께 주최 측이 원하는 내용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관행을 감안하면 이날 공청회는 상당히 신중을 기한 흔적이 뚜렷했다.

우선 기본 주제가 개발시안 공청회였다. 이는 당연히 확정해 두어야 할 역사교과서 서술에 대한 기본 지침부터 확실히 해두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자체를 두고 뭐라 할 여지는 없다. 더구나 이날 공청회 제목과 배포자료에서 명백하게 밝혔듯이, 이날 발표된 지침대로 교과서를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들이 일단 제시한 방향을 밝히고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과정에서 문제가 될 것은 없는 듯하다.

이렇게 공기관이 진행하는 것치고는 이번 공청회에 신중함이 뚜렷했던 데 비해, 참석자들은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날 공청회 주제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상관없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자를 중심으로 한 집필진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언론에 입장을 밝히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다루는 주제보다 너무 앞서 나아가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은 이날 벌어진 다른 사태들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 곧 드러났다. 사실 우리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결정이, 초기단계까지만 신중하게 처리되다가 마지막 단계는 별다른 논의도 없이 결정되어 버리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사태에 익숙해져 있는 전문가들이 미리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구심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주는 사태가 곧 이어졌다. 학술관련 공청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낯선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은 이날 모인 기자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방송에 내보내 달라고 고함까지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저렇게까지 하나 슬쩍 들여다보았더니, 그동안 권희영 교수를 비롯한 보수 계열에서 지겹도록 되풀이해왔던 주장들이었다. ‘좌편향 되어 천안함 사건, 유관순을 빼놓은 한국사 교과서 반대 한다’는 것이 이들이 들고 온 피켓의 주요 내용이었으니까. 뜬금없이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의미까지 따질 여유는 없을 것 같고.

이들은 단순히 기자들 앞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공청회 중 주어졌던 휴식시간이 끝나고 발표가 재개되려 할 때, 이들 중 몇 사람이 사회자에게 질문인지 협박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요구를 해댔다. 발표·토론자의 발언 시간을 줄이고 자신들에게 말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학술토론이랍시고 발표·토론자들 업적 불리기를 위해 덕담 잔치 벌여온 것이 학계이니, 그 업보를 이런 식으로 치른다는 점에서 요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이미 발표가 재개되기 직전에 기자들 앞에서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니 발언권을 주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으면 지능에 문제가 있는 수준이다.

이런 수준이라면 집필 기준 선정에 참여한 연구진들의 의사표시는 매우 점잖은 축에 들 것 같다. 더구나 이들이 주장을 펴는 수준을 보면, 분명 이 분야에 제대로 된 이해를 기대할 상황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접해왔던 보수계열의 주장을 되풀이할 기회를 주면, 이건 역사교과서를 제대로 쓸 지침을 선정하는데 신중하게 의견을 수렴하자는 취지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이날 공식적으로 내세운 공청회의 취지는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 서술의 지침을 마련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침에는 관심도 없이,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삽입해 넣으라는 주장을 과격하게 해대는 사태가 무엇을 의미할 지 확인하기도 민망하다. 이건 의견을 내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주장과 내용을 반영해 내라는 압력을 넣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 자체가 그런 압력을 공공연히 허용해주는 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게 된 배경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들이 내세운 주장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시민 몇 사람의 의사표시가 아닌, 특정 집단이 원하는 대로 교과서를 써내라는 압력을 공공연히 담당 정부기관에 넣는 꼴이다.

그러니 이날 발표장의 분위기는 주최 측의 신중함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공청회에서 무엇을 하자고 정해놓았던 간에, 우리는 우리 원하는 주장 펴고 압력만 넣으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날 기독교 단체 대표가 한국사 교과서에 기독교 관련 서술 부족하다고 유인물 돌린 것은 정말 점잖은 축에 들어간다.

물론 점잖다고 옳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 칼럼에서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으니 되풀이 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이런 행동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기독교 단체에서도 한국사 교과서에 자기 종교 관련 서술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만 부각시켰지, 세계사 교과서에는 다른 종교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점잖게 주장을 편 측의 내용이 이런 정도였으니, 과격한 주장을 편 측이 어떤 수준인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런 문제는 발표 중에도 역력하게 드러났다.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발표자 하나가 공청회 주제와 상관없이 자기는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다’고 밝혀버린 것이다. 이를 빌미로 반대 측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왜 주제와 상관없이 국정화를 반대하는 선동을 하느냐’는 것. 한동안 공청회 진행도 못하고, 발표장은 선전장으로 바뀌었다.

이런 꼴을 보면 오히려 무엇 때문에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면 안되는지가 드러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칠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그저 자신과 자신의 집단이 원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집어넣고 선택할 여지도 없는 내용을 어린 학생들 머리 속에 구겨 넣을 생각뿐이다. 어느 쪽이 이런 진흙탕 싸움에서 이겨,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교과서를 써낸다 해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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