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원론적인 이야기로, 통치자는 국가와 그 국가에 소속된 백성들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이 책임을 자각하고 있는 통치자는 자신의 결정이 어떤 영향을 줄 지도 잘 안다. 그래서 많은 통치자가 수많은 문제를 두고 고심하며,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곤 해왔다. 그런데 통치자 중에는 이렇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통치자는 반대로 제 멋에 겨워 무책임한 결정을 하고, 그 결과는 힘없는 백성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러한 사례 중 하나가 일본 에도 바쿠후의 제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다. 집권 초기에는 나름대로 개혁에 힘쓰던 그가 아들이 죽고 나서 다시 아들을 가지지 못하자 초조해졌던 모양이다. 힘 있는 사람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걸 해결해주겠다고 달려드는 자들이 꼭 생긴다. 이때 적극적으로 나선 자가 류코라는 중이었다.

이 중은 신앙에 푹 빠져 있던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어머니에게 해결책이랍시고 하나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쇼군께서 아들을 두지 못하는 이유는,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던 업보 때문이다. 그러니 살생을 삼갈 것이며, 특히 쇼군이 개의 해에 태어났으니 개를 아끼고 사랑하도록 하라.’

평범한 사람에게 이런 해결책을 내놓았다면, 개를 좋아하는 동물 애호가 하나가 탄생하는 것으로 끝났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절대 권력자인 쇼군에게 한 충고 같지 않은 충고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어머니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이 충고를 반영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 정책이라는 것이 이른바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生類憐令)다. 즉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법이었다.

이 파장은 컸다. 당장 어부나 목축, 사냥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은 생계가 막막해졌다. 심지어 자기 피를 빨아먹던 모기를 잡았다고 처벌받은 시종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개를 학대하면 엄벌에 처해졌다. 개들끼리의 싸움을 말리다가 상처를 입히기만 해도 관리들에게 체포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졸지에 기르던 개를 떠받들고 살아야 하게 된 사람들은, 몰래 갖다 버리기 바빴다. 그래서 버려진 개들이 넘쳐나자,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이런 개들을 돌봐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수만 마리의 개들이, 수의사가 극진하게 돌봐주는 수용소에 모셔졌다. 물론 이 개들에게 공급되었던, 생선을 비롯한 양식은 애꿎은 백성들이 물어야 했다. 이걸 보면 개들에게 주기 위해 잡은 생선은 살생에서 예외가 되었나보다.

어쨌든 굶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정책은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죽을 때까지 20년이 넘게 지속됐다. 이런 정책을 발상을 따져 보면, 대부분의 백성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길도 없는 전생의 업보를 해결하겠답시고, 애꿎은 백성들의 생존까지 위협한 셈이니까.

이런 짓을 한 도쿠가와 쓰나요시 일족이야 생명을 보호했다고 뿌듯해 했겠지만, 이 때문에 고생하다 목숨까지 잃어버린 백성들의 피해를 배상해주었다는 말은 없다. 결국 제멋에 겨워 내려진 통치자의 몇 마디 명령에, 백성들만 생고생하다 목숨까지 잃는 사람이 생긴 꼴이다. 요즘 이런 정책을 내놓는 통치자가 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런데 이런 행각이 우리와 상관없는 일본의 옛 이야기에 그칠 뿐일까. 사실 재미있는 비교대상이 떠오른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다.

물론 다른 점은 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정책이었지만, 우리 국사교과서 문제는 두고두고 국민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문제다. 그러나 발상부터 따져 보면, 본질이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이 점을 따져 보기 위해 대한민국을 달구었던 우리 대통령의 한 말씀을 떠올려 보자.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라셨다. 그러니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서 미천한 국민들에게 정상적인 혼을 심어주겠다는 뜻이 되겠다.

대한민국의 정치를 다 챙기고 외국까지 뻔질나게 다니셔야 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 얼마나 역사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올바른 역사를 꿰뚫어 보는 경지에 오르셨나보다. 사실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역사학자들이라도 ‘올바른 역사’를 아는 척했다면, ‘네가 무슨 신의 경지에 올랐느냐’며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텐데. 대한민국 대통령이시니, 역사연구에 매진하지 않고도 신의 경지까지 단숨에 돌파하셨을까하는 의문은 들지만 미천한 필자가 높은 양반의 경지를 의심하는 불온한 생각은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비정상적인 혼까지 들먹인 이유가, 좌편향에 치우친 국사교과서를 개선해 국론분열을 막겠다는 목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된 사태는 대통령의 의도처럼 돼 가는 것 같지는 않다. 국론분열을 막겠다며 시도하는 정책이라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조용히 지나오던 문제에 심각한 국론분열이 생겼으니 이른바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킨 꼴이다. 벌써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지 두 달이 넘지만 이에 관한 논란이 식을 줄을 모른다. 이에 대한 저항 때문에 국정운영에까지 지장 받는 건 기본이고, 교육현장에서의 갈등은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는 지경이다. 당장 역사학계만 하더라도 이 문제가 불거진 이래, 다른 문제는 본격적으로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대통령께서야 이런 사태가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벌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저항이 있건 말건, 국사교과서 만들어 교육현장에 뿌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해야만 하는 명분을 생각하면 좀 섬뜩하다. 수도 없이 되풀이 되어왔던 그 명분은 교학사 교과서 이외에는 심각한 좌편향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앞장섰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권희영 교수 등의 주장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지만, 주요 주장 대부분이 있지도 않은 좌편향을 조작해낸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선택의 여지없이 배워야 하는 교과서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손에서 만들어진다면 어떤 결과가 날까.

제멋대로 조작해낸 좌편향 근거를 가지고 애꿎은 사람 물어뜯는 짓이 이어질 것임은 뻔하다. 스트레인이나 워킹데드 같은 공포 드라마가 대한민국 땅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핑계를 내세워 실현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세상을 사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을 보면 끔직해 보인다. 사실 우리 사회가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군사독재 시대에 흔히 보던 광경이었으니까. 우리세대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굳이 우리 다음세대에도 겪게 해주겠다는 것이 ‘철 좀 들라’는 교육적 의도는 아닐 텐데.

사실 류코라는 중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자에게 바람을 넣는 지식인은 끊이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의 허영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식인을 앞세우는 통치자도 흔하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놓고 보면 이번 사태도 생각해볼만한 문제가 많을 것이다. 우리 대통령께서도 이런 일을 벌여놓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처럼 자기들끼리만 흡족해 하는 것인지, 미천한 필자가 봉황의 뜻을 몰라보는 것인지…이것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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