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얼마 전, 교육방송에서 ‘시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며 인터뷰 요청을 해왔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이유 1위가 교육 때문이고 보면, 교육방송에서 그 평가 수단인 ‘시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쾌히 요청에 응했고, 이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렇지만 필자는 촬영 중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요즘 언론 상황을 보면 필자가 말해준 내용이 방영이 될 수는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뷰 중에 제작진을 향해 과연 방영될 수 있겠느냐고 몇 번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제작진은 자신 있게 ‘좋은 내용이니 걱정 말라’했고, 인터뷰는 별 일 없이 끝났다. 나중에는 좋은 말씀 감사하다며 또 찾아뵙겠다는 덕담을 문자로도 받았다.

얘기가 이렇게 되었으니, 사실 별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반전이 일어나니,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내용을 조금 살펴보자. 제작진은 총 6부작으로 ‘시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구성했고, 필자는 그 마지막 6부에 해당하는 국가고시에 관해서 언급했다. 앞에서는 주로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본 세상을 그렸다면, 마지막에서는 이들이 그렇게 목을 걸어야 하는 시험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한 언급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1부에서 ‘카스트’라는 신분제도에서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인도에, 신분과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시험이 도입되며 일어난 현상을 다뤘다. 이런 내용은 시험이라는 것이, 부모 잘 만난 사람만 출제하는 사회를 능력 있는 인재 등용하는 사회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훌륭한 제도라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수험생들의 고생을 열심히 그려냈다 하더라도, 이건 훌륭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것 정도로 여기라는 메시지 이상을 주기 어렵다. 당연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시와 입시제도에 가해지는 비판도, 패배자나 정당한 경쟁을 치르지 않고 출세하려는 자들의 비겁한 변명쯤으로 들리게 된다.

하지만 필자의 이야기가 들어가면 잔잔한 반전이 생긴다. 우리 역사에서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신분제사회를, 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하게 만든 것이 고려시대에 도입된 과거제도다. 벌써 천년도 전에 우리 조상들을 신분제를 깨어버리는 인재 등용제도를 마련한 셈이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지 않나? ‘국사’를 배울 때 고려시대는 보통 귀족제 사회였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고려라는 나라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특정 가문 출신이 고위 관직을 독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문신 귀족들에게 핍박 받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던 사태가 이른바 ‘무신란’이다.

즉 국가고시를 통해 인재를 기용했는데도, 골품제 못지않게 특정 집안사람들만 출세하는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겉으로만 보면 똑똑한 유전자는 따로 있으니, 경쟁에서 뒤졌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필자가 반전을 보여준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였다.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치렀는데도, 출세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했으니까.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정말 사소한 것 하나도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요즘처럼 매스컴이 있어서 시험 공고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 당시에는, 지방 벽지에 있는 사람이 시험을 치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리고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제부터다.

사실 평민이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출세하려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먼저 교육환경이 문제였다. 말이 좋아 ‘주경야독(晝耕夜讀)’이지, 실제로 농사일 같은 고된 노동을 하면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그야말로 바늘구멍 통과하기다. 놀면서 졸업하기로 유명한 대한민국 대학도 ‘알바’를 하면서 다니는 것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나온다. 그러니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양반귀족보다 조금 못한 향리(鄕吏)나, 극소수의 평민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과거에 급제하는 경우는 있다. 그렇지만 이랬다고 공정한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고려 이래 전근대 우리사회에는 기득권층에 유리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음서’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건 고위층 아이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해준 제도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도 불공정한 경쟁이지만, 아직 멀었다. 사실 음서 자체만으로는 별 것 아니다. 고위층 중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음서가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막을 알고 보면 그게 그런 것이 아니다. 보통 음서는 10살 전후해서 받는다. 이런 나이에 관리 역할 하라고 벼슬 줄 리는 없다. 그런데 왜냐고? 음서 받은 아이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 효과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과거에 급제하는 평균 나이는 20세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음서를 받은 아이들은 급제와 함께 10년 정도의 경력이 쌓인 상태가 된다. 말단부터 시작하는 향리나 평민 출신과는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요즘도 이등병으로 군대 가서 장군 되는 것과, 장교로 가서 장군 되는 경우를 비교해보면 이해가 쉽다. 이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고위직을 특정 문벌이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도 ‘있는 집 자식’들이 1류 대학에 가서 출세하는 비율이 높은 것과 본질적인 맥락이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시험은 공정하게 인재를 뽑는 척하며, 실제로는 신분을 정당화시킨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서 이런 경향이 심한 나라일수록, 학생들에게 필요한 능력보다 권력이 원하는 답을 잘 찾아내는 교육에 치중한다. ‘죽도록 공부했는데 사회에 나가서 쓸 만한 내용이 없다’는 불평이 달래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필자가 역사 공부하면서 알아낸 이 내용 떠들다가 험한 소리 많이 들었다. 필자 주변에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갈등도 심했다. 이런 소리 하다가, 집안 어른들에게서부터 우리 학교 오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저런다는 구박을 엄청나게 받았으니까. 이러니 일류대학 출신들이 좌우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내용이 방송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작진의 자신 있는 태도에 잠시나마 ‘극단적인 성향의 사장을 거부한 교육방송이니 소신이 통하나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정작 방영 당일, 몇 시간 전에 이 내용이 ‘통편집’ 당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수험생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로 해서’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뭐 하러 쓰지도 않을 인터뷰를 해가며, 좋은 내용 고맙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단지 방영 전 시사회를 하면서 이런 방침이 정해졌다니, 담당 PD와 작가의 뜻 같지 않다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하긴 국사교과서 국정화로 흉흉한 시국이니 별 수 없을 것 같다. 안 그래도 기득권층은 ‘미천한 것들은 그저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한다. 그러니 시험에 대해서도, ‘훌륭한 인재를 뽑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군소리 말고 감수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을 것이다. 이런 메시지에 대해 산통 깨는 소리 해놓고 방송에 나가기를 바란 것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 같다. 앞으로 언론에서 기득권층 싫어하는 내용을 보기도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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