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진 퇴거를 앞둔 서울 아현동 포장마차촌에 가다

   
 

추억이 서린 곳의 마지막 이야기를 담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에 기자가 역사와 추억이 가득한 공간으로 찾아갑니다. 여러분의 아쉬움을 반영해 셔터를 누르고 자판을 두드리겠습니다. 사라져가는 것, 잊고 지내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장면’을 뜻하는 ‘Last Scene’ 연재를 시작합니다.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1990년대부터 명맥을 유지해오던 서울 마포구 아현동 포장마차촌이 3개월여 뒤면 사라진다. 일부 주민의 잇따른 민원으로 마포구청이 자진 퇴거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곳은 동네 주민의 사랑방이자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의 안식처였다. 고령의 상인들도 오랜 기간 같은 자리에 머무르며 사람들에게 추억의 맛을 선물했다.     

아현동 포장마차는 공유지에 가건물을 세운 것이기에 법적으로 따지면 불법이다. 하지만 상인은 “생존”, 단골 고객은 “추억”을 외치며 자진 퇴거 명령에 반대하고 있다.    

본지는 지난 16일 아현동 포장마차의 마지막 풍경과 사람들의 호소를 기사에 담았다.

   
 

초저녁, 아현동 포장마차 ‘작은 거인’에는 슬픔과 웃음이 공존했다. 아현동 토박이였던 조남국(44)씨는 연거푸 소주만 들이켰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오돌뼈볶음과 도토리묵에는 손을 드물게 뻗었다. 술잔 앞에 놓인 뜨거운 어묵탕은 점점 식어갔다. 그 모습을 본 조용분(71)할머니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 아들 주려고 오돌뼈 덜 맵게 했는데”

조씨는 얼굴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애써 감추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쩐 일인지 그는 25년만에 찾은 고향의 단골 포장마차에서 울상을 지었다. 추억이 서린 포장마차, 자신과 성씨가 같다며 아들처럼 챙겨주던 주인 할머니를 이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할머니표 오돌뼈볶음도 먹지 못한다.

   
 

아현동 포장마차촌은 6월이 되면 사라진다. 마포구청은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포장마차가 ‘불법시설물’이라는 민원을 제기했다며 자진퇴거 명령을 내렸다. 포장마차가 자리한 공간은 국공유지라서 법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불법이다. 한편 상인들은 1년에 한 차례씩 도로 사용료 명목으로 구청에 돈을 내며 버텨왔다. 

아현동 일대가 재개발되고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자 상인들은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잦은 민원 탓에 포장마차 16군데 중 몇몇 가게가 이미 자취를 감췄다.

아현동 포장마차 골목은 1940년대 서울의 서민촌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재개발 영향으로 땅값이 치솟으면서 토박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조씨도 25년 전, 정든 고향인 아현동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가정을 꾸렸다.

   
 

그에게 아현동 포장마차는 고향 정취를 느끼게 하는 추억의 마지막 끈이었다. 사회에서 상처받고 힘들 때 술과 사람한테 위로를 받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8명이 둘러앉으면 꽉 찰 정도로 좁은 3평 남짓한 ‘작은 거인’은 조씨에게 남다르다. 이곳은 자리를 비켜주며 술을 주고받는, 혼자 와도 옆 사람과 친구가 되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일 마치고 피곤할 때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수다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그렇게 아침까지 술을 먹다가 그대로 다시 출근한 적도 있다.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편안한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그때 참 행복했는데…”하며 말끝을 흐린 채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추억 가득한 공간이 없어진다니 속상한 게 당연했다. 이에 조씨는 아내와 8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한 것이다. 

아현동 포장마차의 특징은 가격이 없다는 것이다. 주인은 음식 양을 넉넉하게 주거나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손님은 양심껏 돈을 낸다. 주인과 손님이 보이지 않는 정으로 묶인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다.

   
 

할머니와 조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웬 남성들이 문을 빼꼼히 열고 인사했다. 김승환(36)씨와 장모(36)씨였다. 20년 넘게 단골이던 두 사람이 아현동 포장마차촌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사차 들린 것이었다.

“아이고~ 썩을 놈아!!”
“할머니가 하는 욕, 오랜만에 들어서 좋네!”

반가운 나머지 할머니의 목소리 톤이 격하게 올라갔다. 두 사람은 조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함께 맥주를 마셨다. 김씨는 “추억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심정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며 울적함을 드러냈다.

김씨의 친구 장씨 역시 아쉬움은 매한가지였다. “힘든 일이 생길 때 여기 이모랑 얘기하고 조언을 듣곤 했다”며 “사람들과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어 혼자 자주 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할머니는 가게가 없어지면 안 된다고 투정부리는 두 사람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고… 또 와”

   
 

‘작은 거인’이 생긴 지는 어느덧 33년. 처음 포장마차로 시작해서 작은 컨테이너 가건물이 됐다. 조 할머니는 홀로 막내아들의 손녀를 키우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녀를 뒷바라지하려면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조 할머니는 “여기에 우리 인생살이가 담겨 있다”며 “결혼 안 한 딸과 손녀를 먹여 살리려면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답답해했다.

포장마차 상인들은 무엇보다 손님들이 안타까워한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상인 A씨는 새로 생긴 아파트 주민이 자신의 고객이 되리라 생각했다. 상인들도 새로운 이웃이 생겼다고 좋아했지만 기쁨도 잠시, 일부 아파트 주민 등이 포장마차가 불법 시설물이라며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A씨는 “우리는 눈엣가시가 아니다. 조금씩 양보하면서 끌어안으면 아름다운 동네가 될 수 있지 않겠나”라며 “지금 다른 곳에 가 정착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기력이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장사했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A씨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30년간 참 많은 추억을 쌓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잘 싸우던 학생이다. 그 학생이 하도 싸움을 자주 해서 경찰차 소리만 들려도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당시 A씨는 “남한테 상처 주지 말고 학교를 졸업하라”며 학생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그 조언을 자양분 삼아 자란 학생은 이제 울산에서 큰 회사 사장이 됐다. 그 사장은 과거 자신을 이끌어줬던 A씨를 다시 찾아 용돈을 건넸다. 이런 추억 조각들이 A씨가 거친 세월을 버티는 원동력이 됐다.

   
 

‘행운’을 운영하는 송순자(87)할머니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 송 할머니는 지하방에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 2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아들과 함께 산다. 남편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할머니 홀로 40년 넘게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아들과 동생을 먹여 살렸다. 

더욱이 할머니는 2년 전 대상포진에 걸려 온몸 구석구석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내가 늙어서 그런지 손님이 하나도 없다. 참 힘들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 포장마차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걱정했다.

   
 

‘석굴짱’을 운영하는 양모(63)씨도 눈앞이 캄캄하기는 마찬가지다. 양씨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 28년 동안 이곳을 지켰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아직 별다른 계획이 없다. 무엇을 먹고살지 막막하고 심란하다”며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되니 걱정이다. 날짜는 속절없이 돌아오는데”라며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바깥에선 황소바람이 거칠게 불었고 포장마차에는 노란 백열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여기, 촛불을 닮은 아현동 포장마차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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