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갑작스러운 개성공단 폐쇄로 한반도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DJ정권시절 햇볕정책의 구체적 정책 산물이었던 개성공단은 그동안 국내외적으로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었다.

북한 수뇌부입장에서는 짭짤한 캐시 카우 역할을 하던 두 축(다른 한 축은 금강산관광사업) 중 한 축이 계속되는 미사일발사로 날아 가버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국면은 서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북 양측에 의해 충분히 예상됐었다.

핵을 머리에 이고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한국입장에서는 달라 현금을 매달 꼬박꼬박 임금형태로 북측에 제공하면서 개성공단을 계속 유지시켜야할 명분도 이유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사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달러가 북한에 유입되는 작금의 상황을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으로 일관해 오던 미국은 사실 곱지 않은 시각으로 주시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북한의 계속되는 미사일발사로 DJ의 역작이었던 햇볕정책은 이제 국내외 보수파들의 비난 속에 완전히 그 설자리를 잃게 되고 말았다.

최근 박근혜정부의 홍영표 장관은 개성공단을 통해 유입된 달러가 미사일개발에 전용됐다는 의혹을 제기,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비록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북한의 폐쇄적인 의사결정구조로 볼 때 그럴 개연성은 진작부터 제기 되어 온 바 있다.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라고 보면 된다. 한반도가 다시금 북한핵개발로 인한 격랑 속으로 휩쓸리면서 전운이 감돌고,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으로 불안한 전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보면 그의 집권말기 DJ는 자신의 햇볕정책을 충실하게 계승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을 후계자로 찾았다. 그리고 그의 표현대로 깜짝 놀랄만한 젊은 대통령후보가 등장했다.

바로 노무현이었다. 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당선은 당시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하나의 이변이었다.

우리사회 그 흔한 대학졸업장 하나 없으면서 대한민국 권력의 정상에 오른 노무현. 우리사회 보수세력들은 경악했고 무척이나 질시어린 눈으로 그는 집권 5년을 보내야만 했다.

집권초기 당시 ‘검난’이라고 일컬어지던 평검사들의 검찰수뇌부에 대한 반란 즉 ‘검찰 파동’ 속에서 사태진정을 위해 나선 신임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이쯤에서 막가자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상징하던 대통령의 형식과 격식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이었던 검찰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일반국민들의 눈에 비친 대통령 노무현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국민들은 새로운 대통령의 등장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간 중 보여준 파격적인 행보는 수많은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권위적인 대통령상에 익숙해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그는 별로 대통령다워 보이질 않았고 많은 이들이 그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한국의 정치경제 및 사회문화에 충격파를 던지기에 충분했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전임 김대중 정권의 대부분의 정책을 비교적 순응적으로 승계하며 정책을 펼쳐나갔던 노무현. 그러나 퇴임 후 얼마 되지 않아 결국 비극적인 자살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집권기간 내내 숱한 설화를 일으키며 국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대통령 노무현은 그가 집권 시 국민들이 기대하였던 것과는 달리 새로이 집권한 이명박 정권 초기 권력의 눈치보기에 급급했던 일부 정치검찰세력에 의해 희생됐고 그의 인생에서 천추에 남을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결국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은 오히려 현직에 있을 때보다 그의 사후 더더욱 국민들의 기억 속에 아쉬움으로 남는 대통령이 됐다.

필자는 집권기간 중 그의 무면허 운전수의 곡예운전 같은 숱한 섣부른 정책을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고, 우리 한국사회와 같은 보수적인 상황에서는 그의 이러한 행태는 매우 위태롭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그의 순수함이 보수층을 불필요하게 자극해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필자의 우려와 경고는 유감스럽게도 그대로 적중했고, 그의 거듭된 실언과 실정은 결국 대통령으로서는 낯설게 느껴지던 그의 가벼운 행보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대통령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형성케하는 계기가 됐다. 급기야 임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식의 좌파정권으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을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갖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예견하거나 원치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국민기만적인 이명박 정권의 탄생을 그가 돕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노무현은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순수했다. 다만 대통령으로서 적절했는가는 많은 다른 시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이고 제왕적인 대통령에 학을 뗀 국민들에게 노무현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의 친서민적인 이미지는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다줬다.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지지층들의 지지는 우리 정치문화에서는 전혀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거대한 정치자금이 마치 필요불가결한 조건처럼 여겨지던 정치풍토에서 일반인들이 삼삼오오 돼지저금 통을 채워 선거비를 조달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과 단면을 경험하게 되기까지 했고 많은 이들이 이에 호응했다.

그의 고졸임에도 불구하고 고시를 패스해 판사가 됐다는 그의 입지전적인 인생스토리는 오히려 플러스요인이 됐고, 고학력 콤플렉스에 주눅 든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의 징표’처럼 여겨졌다.

그의 선거맞수였던 이회창 후보는 그와 견줘 봐도 너무나도 완벽한 이력을 가진 후보였다. 서울법대-고시패스-판사-대법관-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화려했던 이회창의 완벽한 스펙과 이력에 국민들은 오히려 거리감을 느꼈고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와 서민적인 이미지를 가진 노무현에게 동정표를 던졌다.

여러 선거에서 이미 패배했음에도 불구 노무현은 결국 기적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역사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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