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몇 년 전부터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몇 명 정도가 아니라 100명 단위로 출전시켜, 이 중에서 선택된 11명으로 걸그룹을 만들겠다는 프로그램까지 나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재방송이 나오는 점을 보아 인기가 상당한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도 사랑받고 살만한 소녀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피말리며 노력하는 모습이 각자의 사연과 어우러져 제법 감동을 준다.

물론 먹물 좀 들었다는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춤과 노래에 청춘을 다 바치는 현상에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많은 부모들도 이런 도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공할 확률이 적으니 당연할 것이다. 또 어렵게 성공한다 해도, 어린 나이에 수십·수백억을 벌어들인다며 아니꼽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속 좁은 아집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연예계나 스포츠 활동으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벌어들이는 스타 치고,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지 않는가. 스포츠 스타의 경우, 거의 ‘자해행위’ 수준의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어 내야 한다. 연예 스타 역시 여러 가지 압박에 시달리면서, 완벽을 향한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연습생들 역시, 그에 버금가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춤이나 노래, 운동 좀 잘 한다고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데 교수 연봉은 이게 뭐냐’라는 주변의 말에 필자까지 공연히 낯이 뜨거워진다. 필자도 인문학 분야에서는 제법 노력하는 축이라고 자부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연습생 소녀들 앞에서 얼굴 들고 다닐 자신 없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힘든 입시 경쟁 치렀다는 점을 벼슬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과정을 겪고 제법 한다하는 대학에 들어간 필자 입장에서도, 낯 뜨거운 논리에 불과하다. 이건 자기가 상급학교 올라간 것 뿐이지,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탬이 되는 활약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타성 때문에 마지못해 코가 꿰어 견디어냈던 과정을 가지고, 꿈을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노력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을 짜내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해내는 열정을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대우해주기만 바라는 풍조에 화가 치민다. 이런 말 자체가 이른바 ‘꼰대’같은 발상 이상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열정을 쏟아 부어 ‘한류’라 불리는 흐름의 바탕을 만들어낸 노력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장면도 눈에 띈다. 사실 이 소녀들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생존 게임에 내몰린 상황이다. 보통 이런 상태에서라면 살아남기 위해 못 볼 꼴을 보이고 마는 것이, 주위에서 흔히 보는 현상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와중에 진정한 휴머니즘과 리더십도 꽃을 피우는 것 같다. 이것이 예능 프로그램 중에서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았던 필자가, 이 프로그램만큼은 중독된 것처럼 재방송까지 챙겨 보게 된 이유다.

그 장면은 ‘그룹 배틀’이라고 해서  4~5명씩 조를 짠 다음, 두 팀씩 지정된 곡으로 공연을 해서 승부를 가리는 미션에서 나왔다. 이 게임에서 이긴 팀에 1000표를 보너스로 준다 하니, 한 표가 아쉬운 입장에서는 집착할만한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면서도 투표는 각 개인별로 하게 해놓았으니, 자신을 부각시키면서도 팀의 승리를 챙겨야하는 미묘한 입장에 어린 소녀들을 던져놓은 것이다. 이 평가 이후 탈락자를 정하겠다고 해놓았으니, 소녀들이 느꼈을 절박감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늘이 낸다’는 교수 자리를 두고서도 이런 정도의 절박감을 느껴본 적은 없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꽤 잔인한 상황을 설정해 놓았다. 10%만 살아남는 경쟁에 어린 소녀들을 몰아넣고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려운 미션을 준다. 사실 이런 상황에 사람을 몰아넣고 즐기는 것이 예능 프로그램의 악취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번 경우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경쟁하면서도 협력해야 하는 상황은, 우리 모두가 매일 같이 맞닥뜨려야 하는 일상이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에서도 겉으로는 소녀들의 행동을 엿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투영시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을 우리의 현실과 대비시키며 느끼는 공감대가, 바로 이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 중 하나인 것 같다.

보통 치열한 경쟁에 몰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살 궁리부터 하게 마련이다. 여기서도 어떻게든 팀보다 자신을 부각시켜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팀을 짜서 경쟁하는 방식에서는 변수가 많이 생긴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멤버로 팀을 채우는 것이 좋기만 할 것 같지만 따져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리되면 상대적으로 자신이 부각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마음대로 멤버를 정하지도 못하니, 상대 팀보다 전력을 떨어지는 경우는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는 기본적인 역할도 못하는 ‘폭탄’과 함께 팀을 꾸려 나아가야 하는 수도 생긴다.

여기서도 바로 이런 경우가 생겼다. 이 프로그램 시작할 때부터 걸 그룹 기초 훈련도 받지 못한 소녀 하나가 은근히 눈길을 끌었다. ‘저런 수준에 뭐 하러 여기 참가했나’는 말이 나올 만큼 혹평을 들으며, 흥미를 위한 폭탄 심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멤버가 있었던 것이다. 장본인도, 좀 보태 말하자면 인터뷰의 반을 한숨으로 채울 정도로 자신의 수준을 잘 알고 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 프로그램의 관심사 중 하나에, 이 멤버가 ‘언제 자폭하느냐’도 끼어 있는 듯했다. 하필 이런 멤버가 팀에 들어온 결과, 이 팀은 연습과정에서 서슬 퍼런 트레이너에게 혹평을 넘어 야단을 맞아야 했다.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사람들 대부분의 선택은 어떨까? 팀을 포기하고 자기라도 살 궁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너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며 부족한 멤버를 몰아내는 일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정말 보기 힘든 사건이 일어났다. 리더였던 소녀가, 야단맞고 기죽어 있는 멤버를 다독거리며 가르쳐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 올려놓았던 것이다. 해낸 장본인도 대단하지만, 이를 끌어준 리더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팀에 독설을 퍼부었던 장본인이 달라진 모습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을 보탤 필요도 없겠다. 이 기세를 몰아 이 팀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는 상대 팀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눌렀다.

이 장면에서 의미심장한 점을 떠올려보아야 할 것 같다. 회사건 학교건 매일 같이 마주치는 동료가, 따지고 보면 경쟁자라는 점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살아가면서, 표면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 같아도 돌아서면 깎아내리고 남의 공 가로채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 이를 반영하여, ‘믿을 사람 없는 한국 사람은 외롭다’는 기사가 나와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리더였던 소녀는 보통보다 훨씬 심한 경쟁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자기 시간 쪼개어 ‘잠재적인 경쟁자’의 실력까지 끌어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상생을 넘어 ‘자기희생적’인 리더십이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필자부터도 전봉준·궁예 팔아 리더십 가르쳐왔으면서도 이 소녀가 보여준 만큼의 리더십을 흉내조차 내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소녀의 아버지 나이를 넘고 있는 지금에도, 이런 정도의 리더십을 본 기억조차 없다. 영화·드라마에서 작가 멋대로 설정한 상황과 캐릭터가 아무리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주더라도, 허구임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눈앞에서 담담하게 나타난 현실보다 더한 감동을 주는 것도 무리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없다’는 말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곱씹어 보면, 결국 ‘리더십’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기 어렵지 않다. 따지고 보면 ‘어른’을 찾는 이유도, 다른 사람들을 잘 이끌어줄만한 경험과 인덕을 갖춘 인물을 찾는 것 이상이 아니니까. 이렇게 ‘리더십’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대학에서까지 어찌하면 이 관련 교육을 제대로 할지에 대해 말이 많았다. 그래서 아예 ‘리더십’을 주제로 과목을 개설한 학교도 있다. 그런데 이런 법석이 공허한 말잔치 이상의 것이 아니었나 싶은 회의가 든다.

우리는 그렇게 원하던 어른의 모습을 21살짜리 소녀에게서 보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왔던 교육자들은 뭘 할 수 있을까? 고매하신 교수님들께서 목에 핏대 세우며 몇 달 동안 강의해봐야, 그 소녀가 몇 분 동안 보여준 것 이상을 가르칠 수 있을 리 없다. 비싼 수업료 받아가면서 하는 강의가, 공짜로 보여주는 음악방송 예능 프로그램만도 못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박봉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시간 강사료 챙기는 것조차 미안할 지경이다. 새 학기는 다가오는데, 어린 소녀의 리더십을 흉내 내 볼 엄두도 못 내면서 이제 뭘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난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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