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최근 공개된 초등학교 역사교과서를 두고 벌써 말이 많다. 초등학교 역사교과서는 원래 ‘국정’이었기 때문에 논란에서 좀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음에도, 막상 교과서가 나오고 나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벌써부터 ‘대안교과서 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 가지고 이런 상황 벌어지는 꼴이 바람직할 리는 없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상대방을 몰아가고 단죄하려는 방향으로 치닫는 것 같다. 왜 이렇게밖에 되지 않을까.

이쯤에서 우리 사회가 ‘어른’을 찾았던 이유를 떠올려보자. 이렇게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존경받을만한 인덕과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인물을 바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국정교과서’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를 뒤집어보면, 결국 이런 역할을 해주는 ‘어른’이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 사회 각 분야 원로들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왜 어른 역할을 못하는 것일까.

최근 국정교과서에 관련돼 올라온 기사들을 살펴보다가, 이에 대한 해답을 본 것 같다. 그 단서는 역사학계 원로 한 분의 인터뷰 기사다. 현재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이 분이 언론에 대해 쏟아낸 말들을 보면, 우리 사회 원로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우리사회가 기대하는 ‘어른’의 역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는데 좋은 지표가 될 것 같다.

전반적인 내용은 비교적 익숙하면서도 간단하다. ‘민중사학에 젖은, 그것도 교수도 아닌 교사 등 B,C 급들이’ 대한민국을 망신시키는 좌편향 검정교과서를 내놓았다는 것이 골자니까. 그러면서 스탈린 참모였던 역사학자 미하일 포클로프스키가 했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른바 ‘민중사학자’들을 비난했다. 우리 사회 민중사학자들이 ‘역사 탐구는 연구가 아니라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라는 그의 주장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미하일 포클로프스키의 말은 역사학에 기본적인 애정이라도 가진 사람에게라면 당연히 손가락질 받아야 할 소리다. 대놓고 역사학을 권력의 앞잡이 역할이나 하는 분야로 만들겠다고 공언해놓은 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사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추종하고 있다면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앞잡이 노릇하는데 역사학을 팔아먹는 집단이 ‘민중사학자’ 밖에 없나. 이런 짓이라면 군국주의자 같은 ‘우파’ 진영이라고 안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역사학이 권력의 앞잡이 노릇한 짓은, 좌파·우파 개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오죽했으면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역사를 쓸 때는 사실을 써야지 만들어 넣지 말라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원칙이 강조되어 왔겠나. 그러니 미하일 포클로프스키를 들먹이려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모두 비난 대상이 되어야지 굳이 ‘민중사학자’로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원로 분의 인식에 뭐가 문제가 되는지 드러날 것 같다. 이 분은 미하일 포클로프스키까지 인용해서 ‘민중사학자’를 실컷 비난해놓고는, 자기 입으로 ‘체제 수호가 기본 책무인 국가가 무책임하게 역사 교과서를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결국 역사교과서는 체제수호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뜻밖에 안 되는 이 말이, 미하일 포클로프스키의 주장과 무슨 차이가 날까.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 이후 보수정권이 좌편향 교과서를 방치했다는 점과 ‘정부여당이 끝까지 국정교과서를 밀고 나아가 의지가 있느냐’는 점까지 질타했다. ‘역사 교과서는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 자체는 맞는 말이지만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니, 원칙적으로 타당한 교과서 다양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학문적으로 당연한 원칙도, 그야말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내심을 확인해준 셈이다. 역사를 정치에 노골적으로 악용했던 체제 중 하나가 공산집단이라는 점은 인정하겠지만, 이들이 그러는 건 욕먹어야 할 짓이고 자기들이 하면 괜찮다는 논리는 무엇일까. 이게 바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논리 아닌가.

이 분이 여기까지 이중 잣대를 들이댄 것만 해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확인사살까지 해주셨다. 좌편향 검인정 교과서는 ‘수정’ 정도로 감당해내지 못한 정도로 수준 미달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런 교과서는 민중사학의 대표적 학자도 아닌, 교사 같은 B·C급 필자가 썼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국정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이라면 좀 황당할 것이다. 좌편향 극복하겠다고 써낸 교학사 교과서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이 교과서 필자도 반 정도는 교사였고, 보수정부 치하의 교육부에서도 다른 교과서의 배가 넘는 수정사항이 나왔다. 이런 교과서로 배운 학생은 입시에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잘못된 내용이 많다는 지적이, 여러 사람에게서 쏟아졌다. 일부는 생트집도 있었지만, 이 교과서 대표저자인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 교수 자신이 언론에 문제가 된 내용 상당부분을 받아들이겠다 했을 정도였다.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가 B·C급이라면, 그런 집단에 백 개 단위의 지적을 당한 교학사 교과서는 도대체 무슨 급이라는 얘기가 되나. 교과서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는 이 원로 분의 눈에 이런 사태는 보이지도 않았나 보다.

좌편향은 ‘수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최근 보도된 초등학교 역사교과서 문제를 보면 이중 잣대 같다. 좌편향 저질 교과서의 악영향을 그리도 걱정한 다음에 나온 교과서이니, 나라님께서 어련히 훌륭한 필자를 동원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 ‘이토 히로부미가 성공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이끌었다’는 식의 표현이 나왔단다. 제정신 가진 한국 사람이라면 뒷목을 잡을 이런 내용이 들어갔던 것도 ‘수정했으니 그만’이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좌편향 교과서’의 왜곡이 이보다 심한 수준인가. 이 원로 교수 말씀에 의하면 ‘검정을 통과하면 수정 지시로는 명백한 오류를 걸러내는 정도이지 서술의 기본 정서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다. 그러한 사례로 일부 교과서에 김일성이 치렀다는 이른바 ‘보천보 전투’가 들어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 사실을 알린 자체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고 이는 수정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면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성공’이라고 표현한 정서는 무엇인가. 좌편향 정서는 수정으로 극복 안 되는 것이고, 식민사학이나 군국주의적 정서는 수정하면 그만이라는 논리가 되나.

이 원로 교수님께서 이런 말을 했다는 의미를 모르는 것 같지도 않다. ‘국정교과서를 찬성한다고 하면 원색적인 비난에 인격까지 박탈하는 수준’이라며, 순수한 학문적 차원이 아닌 협박에 위협이라신다. 이런 게 조선의 당파싸움보다 심한 당파심에서 출발한다는 분석이시다.

물론 역사 같은 학술적 문제를 논리적 설득이 아닌 협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까지 비호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좌편향에 대한 비난은 이런 수준이 아니냐는 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좌편향으로 몰리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이유가 된다. 더욱이 이른바 ‘우파’쪽에서도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협박을 해대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필자부터도 수없이 당한 바 있으니 더 확인할 필요도 없겠다.

이런 정도의 이중 잣대 시리즈를 보여주면, 이런 원로 분들이 왜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도 이해가 될 것이다. 한 분의 경우 위주로 얘기하면 보나마나 ‘일반화의 오류’ 운운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술원 회원의 지위까지 가진 분이, 이런 수준의 언사를 언론에 쏟아내고도 아무 일 없는 꼴을 보면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버릴 일은 아니다. 이런 꼴을 보고도 원로들에게 존경심이 생길까.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고 꼰대들만 설친다’는 말은 이미 유명해져 있다. 이런 말이 보도돼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정말 문제는 이런 말을 하는 속마음일 것이다. 인터뷰 기사에 바로 그 점을 시사하는 말도 있었다. 역사교과서 선택을 ‘교사와 학생들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은 덜된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이라신다. 이 분 말씀에 따르자면 역사교과서는 거룩하신 분께서 점지해서 내려 보내야지,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당사자들이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되겠다. 교사와 학생은 그렇게 미천한 존재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바에야 자기들의 일을 스스로 판단할 능력조차 없다는 식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그렇게 이중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국민을 향해 ‘너희들은 자신들에 관련된 일조차 판단할 능력이 없으니 거룩하신 분들이 결정해주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 지도층에 계신 원로 분들이 ‘어른’인지 ‘꼰대’인지를 구별하게 해주는 지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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