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어떤 사회이건 영웅 모델을 만들려고 한다. 영웅이라고 하면 흔히 슈퍼맨 같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만화 캐릭터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회가 만들어내려 하는 영웅 모델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 점은 사회적으로 영웅 모델을 만들어 내려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적 영웅이 필요한 이유는, 그 사회에 필요한 행동을 권장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구름 잡은 이야기가 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이제는 제법 오래됐지만, 십여 년쯤 전에 일본에서 유학중이었던 한국 유학생이 전철에서 낯모르는 일본인을 구해내고 자신이 숨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두고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이 유학생의 행적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추도 분위기를 띄웠다. 평소 서로에 대한 국민감정도 별로 좋지 않은 두 나라가, 이 사건에 관한 한 약속이나 한 듯이 보조를 맞춘 셈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분명하다. 혹시라도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면, 뒤집어 생각해보면 된다.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면,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까. 다시 말해 이런 사건에 대한 무관심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바보짓’이라고 낙인찍어 버리는 거나 다름없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한국이던 일본이던 이러한 효과를 알기 때문에, 언론이 그 유학생의 희생에 대해 그렇게 추도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 잇달았다. 이것이 바로 영웅모델의 효과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행위를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각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 한 몸 챙기기도 힘든 상황에서, 능력 떨어지는 동료를 챙기며 이끌어주는 사례에 대해 칭송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모델은 점점 더 필요해진다. 사회가 발전한다고 하지만, 그만큼 각박해지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간다. 드라마 미생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장면도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 걸려오는 전화조차 처리하지 못해서 쩔쩔 매고 있지만, 도와달라고 매달리면 신경질 내기만 할 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일을 가르쳐 주어야 할 바로 위 고참은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요즘 보기 드문 젊음이’라 비아냥대며 쫓아낼 궁리만 한다. 그나마 과장님처럼 실컷 화를 내다가 한두 번 챙겨주는 것만 해도 훌륭한 멘토라며 칭송이 이어지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비록 드라마지만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그럴 만큼 이런 현상이 사회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전이 될 만한 사례를 조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사회적 영웅 모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분명해 질 것 같다. 사회적 영웅은 사람 하나를 성인(聖人)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부각시켜 권장하자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웅은 항상 용감한 것이 아니라 5분 동안만 남보다 용감할 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래서 사회적 영웅 모델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허무맹랑한 캐릭터가 아닌, 필요한 용기를 내는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슈퍼맨 같은 초인적인 영웅은, 그저 눈요깃꺼리에 불과할 뿐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웅모델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영웅모델을 꽤나 싫어하는 집단이 있다. 필자 주변에도 널려 있으니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처절한 경쟁 속에서도 모자란 동료를 챙겨 나아가는 이야기를 꺼낼라 치면, 썰렁하다 못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왜 이럴까. 알고 보면 이유가 간단할 것이다.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비슷한 행동을 흉내라도 내 볼 생각조차 없으니까. 그만큼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남의 머리 짓밟아 출세해보려는 야비한 싸움을 하며 살아가자면,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발휘되는 휴머니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싫을 것이다. 겁쟁이들일수록 용기를 낸 사람에게 칭송 쏟아지는 꼴이 달가울 리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용기가 칭송받는 분위기에서는 자기들 같은 겁쟁이들이 설 곳 없어진다는 점 자체가 그들에게는 위기일 테니까.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마치 성스러운 세상에서 고매한 인격을 유지하며 사는 것처럼 군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눈 감아 줄 수라도 있다. 정말 가증스러운 점은 그런 족속들일수록 한 발 더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게 바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웅모델을 조작해내 악용하는 경우다. 이것은 꼰대들이 사회에 저지르는 범죄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 후유증은 은근히 끔찍하다.

이들이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인물을 보면 왜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델보다, 자기네 문중 또는 정치적으로 연결되는 패거리 중에서 힘 좀 쓴 인물을 띄우려 한다. 즉 우리 가문 잘났다던가, 자기네 유리한 정치를 하기 위해 내세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의 실제 행태가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도 의문이지만, 혹시 그런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점을 내세워 후손들이 자기들 사리사욕 채우는데 악용해 버리면 나쁜 영향만 남게 된다. 이는 단순히 본받을 가치가 없는 행실을 가지고 국민의 추앙을 받는 꼴이 되어버린다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인물들이 국가 사회에 미친 해악을 미화해, 앞으로도 그 계파가 비슷하게 사회를 말아 드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역사학계에서만 해도 ‘영웅은 장본인의 행실이 아니라 후손의 포장으로 결정 된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 된지 오래다. 심지어 대한민국 역사학계 일부는 ‘문중사학에 기생해서 먹고 산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렇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들을 비롯한 특정 인물을 미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려되는 것이다.

이런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아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 뭐든 의심부터 하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걸핏하면 인물 평가 조작해내는 꼴을 보게 되니,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을 보더라도 못 믿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는 속담처럼 살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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